한양과 춘천으로 향하던 조선시대 가평의 중심 교통로인 대로(大路)는 현재 국도 제46번 도로의 일부인 경춘로와 거의 일치한다고 전해진다. 6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지금까지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며 소통의 통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가평중심대로는 가평동헌을 중심으로 서쪽로는 한양, 동쪽로는 춘천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헌이 위치한 군내면을 지나 한양 방향인 서쪽 대로를 향해 발길을 옮기면 먼저 내서면의 중심지인 현재의 하색리에 다다른다.
내서면 사창(社倉)이 설치된 이곳은 고려원수 이방실(李芳實) 장군의 묘를 비롯해 조선조 시절의 문필가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의 묘, 1896년 을미의병운동 당시 가평의 의병대장이던 이충응(李忠應)묘 등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하색리를 지나면 한양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첫 번째 고개를 맞이하게 된다. 한양 방향으로는 첫 번째이지만 가평 방향으론 마지막 고개가 바로 색현(色峴)인 것이다.
색현은 한자 뜻 그대로 빛고개라고 불리며 현재도 그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 고갯길은 경춘도로가 확포장되면서 옛길과 현재 길 국도 46호선이 공존하고 있다.
옛길 색현은 곧고 완만한 지금의 국도 46호선과는 달리 산 좌측 방향으로 산허리를 감싸며 여러 번을 굽이치며 다소 거칠게 길이 나 있다.
색현을 넘으면 감천역(甘泉驛)이다. 색현을 넘자 양쪽에 위치한 산들 아래 길게 뻗은 개울과 도로가 눈에 들어온다. 지형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만든 도로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감천역은 조선시대의 도로 중 평구도(平丘道)에 속하는 역이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경기도에는 평구도를 포함한 6개의 역도가 있었으며 평구도에는 가평지역의 감천·연동역을 포함한 11개의 역이 소속돼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감천역은 조선시대까지도 현 상천역 부근에 설치돼 서울이나 지방관서를 왕래하는 관리들의 침식을 제공하는 곳으로 운영됐으며 점막이라고 불리는 여관도 들어서 성행했었다고 전해진다. 교통수단이 제대로 발달되지 못해 수도로 통하는 지역 곳곳에 역우(驛郵)를 설치하고 그곳에 말과 마부를 상주케 하고 중앙이나 지방으로 연락하는 관리들의 교통편의와 숙소 등을 제공했다.
감천역을 지나면 조종천과 고려시대 가평지역에서 수도 개경으로 향하던 춘주로의 일부인 국도 37호선과 조우하게 된다. 시대변화에 따라 나라의 수도로 향하던 가평의 중심 교통도로가 종에서 횡으로 바뀌는 지점이기도 하다.
조종천을 건너 엄현(奄峴)을 넘으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의 마을이 나온다. 바로 청평인 것이다. 청평은 가평이나 조종, 양근 등지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왕래하던 곳으로 주막과 여숙(旅宿)이 운영되던 활기찬 마을로 짐작된다. 예나 지금이나 청평은 가평군과 인근 지방을 이어주고 있는 교통 중심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조선시대 가평과 한양을 잇는 길은 조종천을 세 번 건너야 했다. 경춘로도 예전에는 조종천을 세 번 건너게 돼 있었다고 한다.
'해동지도'에 따르면 당시 조종천(물길이 지나는 마을 지명에 따라 조종천, 잠곡천, 청평천으로 불림)에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다리의 형태, 규모 등에 대한 구체적 자료는 알려진 바 없지만 그만큼 교통이 활발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해진다.
현재 경춘로는 도로교통 개선 등으로 일부의 노선에 변화가 있었지만 현재의 경춘로 하행선은 여전히 조종천을 세 번 건너고 있다.
청평을 휘감으며 흘러 북한강에 합류하는 조종천을 뒤로 하면 1872년 지도에 가평군에서 유일하게 여관 마을임이 표시된 청평점(淸平店)이 나타난다.
청평천의 점막이 옛 지도에 특별히 기재된 것을 보면 그곳이 특히 많이 이용되는 여관 또는 여관 동네였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청평점을 지나면 대승리(大升里)다. 대승리는 현재의 원대성마을로 청평천을 건너 북한강을 왼쪽에 두고 있는 곳으로 강 건너 양근으로 통하는 길목의 나루터다. 청평천과 대승리는 당시 양근으로 건너가는 나루였으므로 점막이 성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승리를 지나면 굴운천(窟雲川)에 닿게 된다. 지금의 남양주시와 가평군의 경계지점 구운천인 것이다. 가평에서 출발, 서쪽 방향으로 향한 경춘선 여정은 구운천을 지나 평구역, 망우리, 한양으로 이어지고 있다.
# 수도 한양과 영서지방을 이어주고 있는 경춘로
가평과 춘천을 이어주던 길에는 두 개의 노선이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동헌에서 출발, 가평천을 건넌 후 보납산과 초연대 사이를 통과해 북한강을 따라가는 옛 경춘로가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이 길은 강가를 따라가는 부분이 매우 험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동헌에서 화천 가는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가평천을 노루목고개로 우회하면서 개곡리 능우동을 거쳐 줄길이고개를 넘는 또 다른 길이 교통로로 이용됐다고 전해진다.
18세기 중엽의 가평군 지도들에는 가평, 춘천간 경로를 뚜렷이 표기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같은 시기 춘천지도에는 가평 경계를 넘어 춘천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강가에서 상당히 떨어진 산줄기에서 고개를 넘는 것으로 표시되고 있다.
개곡리에서 고개를 넘는 것으로 표기한 것으로 판단하는 의견이 제시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1872년 지도에서는 명확히 보납산과 초연대 사이를 넘어서 북한강 북변으로 접어드는 것을 표기하고 있다.
마침내 옛 경춘로와 일치하며 군사적·행정적으로 중요한 교통로로서 영서, 영동을 수도 한양으로 이어주는 경춘로의 뿌리가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수도 한양과 가평, 춘천 등 영서지방을 이어주던 옛길은 지금의 경춘로 뿌리이며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가평지역의 또 다른 역사로(歷史路)인 것이다.
글┃가평/김민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