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ilitarized Zone'. 비무장지대를 의미하는 이 영어 단어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는 동안, 이로부터 발생되는 분단, 이산, 민통선이란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점점 줄고 있는데, 이 와중에 사람의 출입조차 제한받는 민간인 통제선으로 예술을 끌고 들어간 이가 있다. 오로지 초록과 고요로 전쟁의 참상을 대변하는 이 곳에 노랑 주황 색깔을 뿌리고 음악을 울려 더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며, 이곳 역시 우리의 발길과
문화가 마땅히 닿아야 할 곳이라고 매년 예술제를 통해 부르짖는 석장리미술관 박시동 관장의 연천살이 20년을 듣고왔다.
# 오지 미술관
수원에서 출발해 연천군 백학면까지 꼬박 2시간을 달려 미술관 근처에 다다랐는데,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면서도 취재진의 불안이 고조됐다. 아무리봐도 미술관이 있을 곳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호사스러운 시설은 축사뿐일 것이라는 데 거의 확신을 가질 무렵, 마을 길 끝에서 별안간 호화스러운(?) 미술관이 나타났다. 제법 넓은 부지에 카페와 펜션이 있고 무대시설도 갖춘 미술관이다. 다만 갤러리는 없다.
조각가이기도 한 박 관장은 자신의 작품을 야외 전시장에 뒀다. 그의 작품 중에는 유독 '발'을 모티브로 한 것이 많다. 박 관장은 "대부분 냄새도 나고, 몸의 가장 아래 쪽에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으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발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게 아니냐"며 "정작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게 발"이라고 자신의 예술론을 펼쳐보였다.
갤러리격인 미술관 야외 공간에서 크기나 색깔이나 모양이나 어떤 면에서든 가장 눈에 띄는 것도 발이다. 사람 키를 넘는 크기의 샛노란 발 조형물에 박 관장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 발이 잔뜩 힘을 준 듯 발등이 솟아있고 발가락 10개는 쫙 벌어져 어느 방향으로 힘을 가하든 충분히 몸을 지탱해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나아갈 듯하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는 이들의 발은 틀림없이 저런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보는 이의 발에도 힘을 불어넣으며 무엇이라도 시작하고자하는 충동을 일으키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조각가입니까?'라는 질문에 박 관장은 '이 양반이 무슨 소리를 하나'하는 얼굴로 '나는 농사꾼'이라고 대답한다. 인터뷰가 진행된 카페 앞 테이블 밑에 자라고 있는 것은 잡풀이 아니라 질경이란다. 농약도 안주고 그저 밟히면 밟는대로, 비오면 비에 잠겼다가 가물면 햇볕을 정면으로 묵묵히 받아내며 크는 질경이와 민들레, 오디와 돌복숭아를 박 관장은 때되면 거둬 효소차를 만들어 오는 이에게 대접한다.
# DMZ민통선 예술제
올해 6월6일, 제 13회 DMZ 민통선 예술제(DMZ Art Festival)가 열렸다. 내년에도 같은 날 14번째 축제가 열릴 것이다. 올해는 '민통선 사람들'을 주제로 조각, 설치미술 등 국내 작가의 작품과 함께 10여개국의 외국 작가들의 작품도 전시해 국제 예술제로 발돋움했다. 'DMZ민통선 예술제'는 석장리미술관이 문을 연 1999년부터 시작됐다.
처음 시작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박 관장은 "첫 회 예술제를 하기 위해 무작정 한국전업작가회 도록을 보고 작품이 좋은 작가 40명에게 자필로 쓴 편지를 보냈는데 그 중 36명이 긍정적인 답을 보내왔다"며 "내가 인덕은 좀 있는가 싶었다"고 그 때를 떠올렸다. 작가들이 자비로 장비를 동원해 작품 50점을 운반하는데 그나마도 비포장 도로에 비가 많이 오면 길이 끊기는 곳에서의 예술제니 축제에 금전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애당초 축제의 시작은 박 관장의 마을 청소년 무료 교육에서 비롯됐다. 박 관장은 "학교 교사로 있을때 동네 주민이 토요일에 애들 미술 교육을 부탁해 무료로 지도하는데 서울 아이들과 문화 차이가 너무 심하더라"며 "지역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문화를 보여주려고 추진했다"고 예술제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외국 작가들에게 더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박 관장은 "민통선에서 하느라 축제 허가받기도 힘들고 사람 모으기도 어렵고 돈도 없지만 DMZ덕을 좀 보기도 한다"며 "외국작가들에게는 DMZ라는 공간 자체도 흥미로운데다 군의 협조로 통역서비스도 제공되고 철책 안에도 들어가 볼 수 있으니 좋은 기회가 아니겠나"고 말한다.
외국 작품도 있고,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하려니 영상과 음향 등 돈 들 일이 하나 둘이 아닐 것 같지만 박 관장은 '돈으로 하는 게 아니다"라고 딱잘라 말한다. 박 관장은 "돈이 많으면 사가 낀다"며 "작가들한테 '민통선예술제'에 참가한 것만으로 가문의 영광으로 알라며 큰소리 친다"며 허허 웃는다.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는 미술관 내 펜션을 무료 이용할 수 있는 쿠폰을 만들어 도록에 첨부했다. 외국작가들한테도 이 쿠폰으로 작품 전시 비용을 대신했다. 몇 분이나 오실는지는 모르겠다며.
# 전천후 생활형 예술가
군이나 도에서 지원받는 것도 많지 않은데 매년 예술제를 치르면 돈은 어디서 나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박 관장은 준비된 듯 바로 "전기세는 펜션 손님들이 내주시고, 밥은 대출받고 땅 잘라 판 돈으로 먹고 산다"고 대답한다. 살림은 넉넉지 않아도 받는 손님을 가린다. 박 관장은 "풀도 꽃이고 여기서는 다 효소 재료인데 그런 풀을 함부로 하거나 펜션을 모텔로 생각하고 잠깐 쉬었다 가려는 사람들, 애들 교육 잘못시켜서 조각에 매달리는 가족들은 다 내쫓는다"면서도 "가진 게 없어도 작가의 취지가 좋으면 레지던시를 후원하기도 한다"고 말했다.주거니 받거니 상부상조 두레정신이 계승되는 미술관이다.
대학시절 전시 여행을 다니고, 여고에서 미술교사를 하는동안 방학을 이용해 유럽 여행을 하며 '문화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박 관장은 1990년부터 이곳 연천 백학에 부지를 마련했다. 이 깊은 시골마을로 들어온 것은 '술먹자고 불러는 사람이 하도 많아 3년정도만 작품에 매진하기 위해서'였지만 처음의 생각을 바꿔 평생을 보낼 작정이다. 간
신히 건축 허가를 받아 동네사람들과 소나무와 흙으로 집을 짓고 예술제를 벌인지 13년. 처음에는 경찰과 군의 감시 대상이었고 마을사람들에게는 괴짜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동네의 자랑이 됐고, 축제때 군의 전폭적인 협조를 받는다. 박 관장은 "여기가 가깝게는 한국전쟁 수복지역이지만 멀게는 삼국시대부터 영토 분쟁지역이라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이 많은 곳"이라며 "그만큼 중요한 우리 영토인데 지금은 사람도 통제되고 문화는 말소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쓴 입맛을 다셨다.
미술관이라 하면 도시 문화의 결정체라 생각되게 마련이지만 이곳 석장리 미술관에 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친환경적인 미술관이 다있나' 싶으면서도 도시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문화의 다른 면을 보게 된다. 작고 조용한 마을에서만 가능한, 돈은 없되 사람 냄새 나고 자연이 작품과 어우러진 미술관은 그 자체가 한 폭의 그림같다. 박 관장은 "삶 자체가 예술이니 사람은 모두가 예술가"라며 이곳에서 오랫동안 예술가로 살아가겠노라는 소박한 희망을 밝혔다.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석장리 875 (031)835-2859
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