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속의 작은 중국으로 불리는 인천시 중구 선린동 일대 차이나타운이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모습은 더이상 인천 시민에게는 낯설지 않은 모습이 됐다. 한중 수교 이전 4~5곳에 그치던 이곳 차이나타운의 상점 숫자도 꾸준히 늘어 지금은 60여곳이 성업중에 있다. 지금은 인천의 대표 관광지가 된 이곳 차이나타운과 이곳을 지키고 살아온 화교들의 이야기를 돌아본다.
■ 차이나타운 역사
차이나타운의 역사는 130여년전 인천에 화교가 정착하면서 함께 시작된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인과 함께 온 40여명의 상인들은 청나라 군대에 물자들을 공급하며 조선 상인과 무역도 진행했다. 이후 1884년 4월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며 현재 인천시 중구 선린동 일대 1만6천525㎡ 규모의 토지에 중국 조계지가 세워졌고 그해 10월 청국 영사관도 이곳에 건립된다. 중국의 조계지가 생긴 후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많이 세워졌는데 이곳이 바로 현재 '차이나타운'의 최초 모습이다. 인천에 조계지역이 설립되면서 화교의 수도 급증했다. 1883년 48명이던 화교가 1년 뒤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약 1천명에 이르렀다.
당시 화교 대부분은 인천을 상업 활동의 중심으로 삼았다. 중국에서 수입한 식료품과 잡화를 팔고 다시 조선의 사금 등을 사들여 중국에 보내는 방식으로 시장의 전반적인 상권을 장악했다. 특히 인천 조계지내의 화상들은 전국에 퍼져 있는 화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사업을 키웠다. 1898년 의화단의 북청사변으로 중국인들이 피난차 한국의 인천으로 대거 건너오는 등 인천은 어느새 화교의 근거지가 돼 서울 다음으로 화교가 가장 많이 모여 살았다.
1894년 청일전쟁 패배로 차이나타운을 비롯한 화교 사회가 위축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수도 베이징을 서방에 내주고, 타이완과 만주지역은 사실상 일본이 주인 역할을 하게 된다. 자연스레 한국 화교들의 생활도 안정적일 수는 없었다.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을 거치며 차이나타운은 거의 파괴되고 만다.
전쟁 후 화교는 한국에서 외면 당하기 시작한다. 화폐개혁으로 장롱속 돈을 모두 신고해야 했고, 외국인 부동산 소유 제한으로 그들이 반세기 이상 농사지어 온 주안·용현동·부평 일대의 농장이 헐값에 판매되거나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자연스레 반수 이상의 화교들이 이 땅을 떠난다.
그러나 인천 차이나타운은 한중수교와 함께 재도약의 기회를 맞이했다. 한국전쟁 이후 위축된 차이나타운은 인천이 대중국 교류의 중심도시로 성장하고 이 지역의 역사성과 문화가 새롭게 재조명되며 인천의 새로운 문화·관광 명소로 부상, 재도약의 기회를 맞았다. 인천시와 중구청은 이 지역을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정부 예산과 지자체 예산을 투자해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09년에는 지역 우수 관광특구로 선정되기도 하는 등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다.
■ 화교(華僑) 사회의 시작과 흥망
화교란 말은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을까? 1898년 일본 요코하마에 중국인 학교가 세워지고 '화교학교'라는 교명을 쓴 것이 최초라고 전해지고 있다. 중국 사람들이 외국에 이주한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르지만 정식으로 '화교(華僑)' 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100여년 전인 청나라 말기라고 전해진다. 1898년 중국인들은 일본 요코하마에 학교를 세워 정식으로 '화교학교'란 이름을 지어 이때 세워진 화교 학교들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옛날 청과 조선이 서로 교환한 문서를 살펴보면 화교에 대한 명칭이 청조인(淸朝人)·화인(華人)·상(淸商) 등으로 다양하다.
후에 청나라 농공상부 대신이 작성한 문서에 '화교'라는 단어가 나타나게 된다. 이후 1909년의 청나라 헌법과 1929년의 중화민국 헌법에 의하면 '외국에 거주하면서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모두 화교라고 부른다'고 나와 있다.
한국에 화교사회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그보다 앞선 1882년부터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임오군란 발발과 동시에 화교가 한국으로 함께 이주해 왔다는 기록을 근거로 이때를 본격적인 화교 사회 형성의 시작기로 보는 시각이 많다. 고종 19년(1882년) 6월 일본이 조선에서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청은 조선을 돕기 위해 3천여명의 군대를 파견했는데 이들 군대는 3척의 군함과 2척의 상선으로 나누어 산둥성에서 출발해 한 달 뒤인 7월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청군과 함께 한국에 온 화상수는 40여명으로 이들이 한국 화교의 시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은 원래 한국에 머무르는 청군을 돕기 위해 온 것인데 청군이 오래 주둔함에 따라 한국인과 교역을 담당하게 됐다. 초기 2~3년동안 이들의 상업 활동은 청의 보호와 오장경 제독의 보호에 따라 순조롭게 발전했고, 이후 화상들이 상업 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공고한 기반을 만들었다. 화교 경제의 발전은 '병상통일주의(兵商統一主義)'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화교 사회의 이같은 경제 호황은 1948년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되면서 막을 내린다. 그후 화교 사회는 우리 정부의 각종 제도적 제한과 차별 대우 아래 위축되어가면서 화교의 이동이 본격화됐다.
한국 화교는 음식업에서도 여러 제한과 차별대우를 겪어야 했다. 한때 4천여개가 되던 중국 음식점이 현재 대략 1천여개로 감소했다. 차별과 제한을 견디지 못한 화교 음식업자들이 대거 미국으로 건너가 음식점을 차려야 했다. 한국 화교의 인구는 점차 감소해간다. 이들은 1970년대 초부터 미국을 비롯해 호주나 대만 등지로 이주했다. 1960년대말까지 4만명을 헤아렸던 한국 화교들 가운데 2만명 이상이 1970년대 이래 외국으로 이주했다고 전해진다.
/김성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