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짜장면 박물관으로 새 단장한 '공화춘'

한중 교류가 시작되며 음식문화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짜장면이다. 짜장면의 시초를 두고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짜장면의 고향은 바로 인천이라는 게 일반적인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올해는 짜장면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음식점인 공화춘 이름이 사용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인천의 중국요리 짜장면과 공화춘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 짜장면의 역사

중국요리 짜장면은 한국의 대표음식 중 하나가 됐다. 졸업식을 마치고 온 가족이 짜장면을 먹던 시절이 있었을 정도로 짜장면은 한국 외식문화의 시초가 되며 문화를 이끌었다. 배달음식으로도 확고히 자리를 잡은 짜장면. 한국인의 식생활에 결코 적지않은 변화를 가져온 그 짜장면의 시작은 언제일까? 짜장면은 인천 개항(1883년)과 함께 중국 산둥지방 화교들이 인천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에 소개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인천항에서 일하던 화교 출신 노동자들이 간편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음식으로 짜장면을 만들었고, 지금의 짜장면의 시초라는 것이다. 중국 요리는 조리법이 복잡해 대부분 조리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빨리 먹기에도 불편한 점이 많았던 반면, 짜장면은 손쉽게 만들어 빨리 먹을 수 있었다. 이러한 짜장면의 장점 때문에 화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짜장면은 일제시대 요정(고급 음식점)문화가 확산되면서 조금씩 알려지게 된다. 고급 중식당들의 메뉴에 짜장면이 이름을 올리게 되고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본격적인 중국 요리로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짜장면이 외식문화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사자표 춘장'의 등장과 전후 미국의 밀가루 원조가 계기가 됐다. 1948년 '영화장유'라는 식품회사를 차린 중국 산둥 출신 화교 왕송산은 달콤한 맛을 좋아하는 한국인을 위해 중국 춘장에 설탕을 가열해 만든 끈끈한 갈색의 물질인 캐러멜을 혼합했다. 여기에 6·25전쟁 후 가장 많이 지원된 것이 밀이었는데, 때마침 쏟아져 나온 값싼 밀가루와 이 소스의 만남으로 '짜장면'은 더욱 대중화됐다.

전문가들은 1970년대를 짜장면의 전성기라고 부른다. 쌀이 부족했던 시절 정부가 혼분식 장려운동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면서 짜장면을 찾는 이들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에서 원조받은 밀가루로 라면이나 국수, 짜장면 같은 분식류를 만드는 업소도 이때 함께 호황을 누렸다. 졸업식이나 생일때 부모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짜장면집으로 향하는 것도 1970년대부터 생겨난 모습이라고 한다. 어려웠던 시절 부모들이 큰 마음 먹고 외식할 수 있었던 곳이 바로 '중국집'이었던 것이다. 공화춘도 1970년대 전성기를 함께 누렸는데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 여사가 자주 이 곳을 찾아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짜장면의 가격도 물가에 따라 변했다. 1960년대 초 짜장면 한 그릇 가격은 15원 수준. 이때 쌀 80㎏ 한 가마니 가격이 3천10원이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140원, 1980년대에는 350원으로 올랐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를 거치며 짜장면 값은 급등했다. 1990년대 초기 1천300원이던 짜장면 한그릇 가격은 2000년대 경제위기를 전후로 3천원에 이른다. 이때 쌀 한가마가 20만원이었다. 요즘 짜장면 한 그릇은 4천~4천500원, 50년동안 약 450배가 올랐다. 지금은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 변화가 국민 물가에 영향을 끼칠 만큼 대중적인 음식으로 통한다.

■ 공화춘의 역사

공화춘은 중국 신해혁명(1911년) 후 '공화국 원년의 봄'을 맞는다는 의미. 1912년에 사용하기 시작한 중국음식점 이름으로 짜장면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공화춘이다.

등록문화재 246호인 공화춘은 중정형의 중국식 건물로, 외부는 벽돌로 마감하고 내부는 다양한 문양과 붉은색을 사용해 화려하게 장식됐다. 건축에는 중국 산둥지방의 장인이 참여했다. 공화춘은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중국인이 지은 요릿집으로 처음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이용됐다. 그러다가 중화요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음식점 공간이 늘어나 대형 연회장을 갖춘 유명한 중국 요릿집으로 변모해 1980년대까지 그 명성을 날렸다. 인천시 중구에서 건물을 매입한 후 건물을 보수하고 내부에 전시공간을 마련해 2012년부터 짜장면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화춘은 1907년경 중국 산둥에서 인천으로 이주한 화교 우희광(于希光·1886~1949)이 '산동회관'을 설립한 데서 시작됐다. 현재의 공화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처음 문을 연 산동회관은 청국에서 이주한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성격의 업소였다. 산동회관은 중국에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의 전제정치가 막을 내리고 공화정을 표방한 중화민국이 탄생하자, '공화국에 봄이 왔다'는 뜻을 담아 1912년경 업소의 명칭을 '공화춘(共和春)'으로 바꿨다.

공화춘이 현재의 장소인 중구 선린동 38로 옮겨 온 시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1917년 현재의 장소인 선린동 38의1 건물을 공화춘을 비롯한 여러 명의 화교가 공동으로 매입한 기록이 남아있고, 1934년 7월의 인천지역 화교 상인 명부에 중화요리점으로 공화춘이 등재된 점으로 미뤄 공화춘은 이르면 1917년께, 늦어도 1934년께는 지금의 장소에서 중화요리점 영업을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강점기 고급 중화요리점으로 경인지방에서 명성이 높았던 공화춘은 한국전쟁중 일시적으로 영업을 중단하기도 했으나, 휴전 후 우희광의 장남 우홍장이 공화춘의 주식을 인수하고 1968년께 인접 건물을 매입해 대형 연회장을 갖추면서 1970년대까지 경인지방 5대 중화요리점의 하나로 그 명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중화요리업에 진출하고 차이나타운 일대의 인천 구도심 상권이 쇠락하면서 경영이 어려워져 1983년 문을 닫았다.

/김성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