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지: 전북 진안 천반산(657m)

■ 산행일시: 2012년 8월 26일 (일)

○… 산행 안내

■ 등산로

가막교 ~ 할미굴 ~ 한림대터 ~ 천반산성터 ~ 송판서굴 ~ 깃대봉 ~ 먹개골 ~ 가막교 (4시간)

■ 교통

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익산장수고속도로-진안IC-진안로터리-가막교

 
 

# 가벼운 걸음으로도 족한 무난한 산길

비 갠 하늘과 엄청난 바람을 몰고 오는 태풍이 상륙한다는 소식에 긴장을 하며 찾은 산이 천반산이다. 비교적 맑은 날씨를 유지하는 가운데 진안 땅에 접어들어 산행 들머리로 삼은 가막교를 건넜다. 금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진작에 내렸던 비의 영향인지 제법 물살이 거칠다.

장수명륜학당 표지석을 따라 좌측의 농로로 가자 호익물산 건물이 눈에 띈다. 그곳에서 만나게 된 이정표를 지나 능선길로 향하는 길을 타고 15분 정도 진행하자 삼거리가 나온다. 할미굴로 가는 길이다. 할미굴은 20m 절벽 아래에 깊이 5m 정도 파인 자연석굴로 쌍굴 형태로 파여 있다. 할미굴은 조선 세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송보산 선생이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후학을 가르치는 데 몰두하다가 이곳에서 북쪽으로 100여m 거리에 있는 굴속에서 은거하면서 부인과 동침을 금하기 위해 부인을 따로 이곳에 기거하도록 하였기에 불리게 된 굴이다.

전설에 따르면 송 판서가 수도하면서 쌀 한 되를 부인과 나누어 갖고 부인에게 한 끼에 쌀 세 알, 생솔잎 세 개, 굴속 석간수 세 모금만 먹도록 했는데, 부인이 그 약속을 어기고 많이 먹어 부인의 쌀이 먼저 바닥이 나자 자신의 남은 쌀을 다시 반으로 갈라 부인에게 주어 함께 수도를 마쳤다고 한다. 소소한 읽을거리가 간판으로 서 있는 굴 입구를 되돌아 나와 한림대터로 향한다. 굴참나무, 참나무가 가득한 산길로 그다지 어려운 길이 아니다. 옛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논하던 장소라고 전해지는 한림대터에 서자 멋진 조망이 이어진다. 금강의 힘찬 물줄기와 멀리 마이산의 독특한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오니 쉬어가기 안성맞춤인 것이다. 한편 북쪽으로는 운장산과 구봉산이 펼쳐져 있어서 함께 온 이들과 천반산 이야기를 풀어본다.

 
 

# 정여립의 한(恨)이 서린 땅

천반산은 선조 22년(1589년)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호남 차별의 분수령을 이룬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주인공인 조선중기 사상가 정여립(1546~89)의 한(恨)이 서려 있는 곳이다. 정여립은 전주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15세에 익산군수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할 정도로 영민하였고, 선조 3년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이라는 벼슬에 올랐으나 그의 스승인 성호 이이가 죽자 서인(西人)에서 동인(東人)으로 옮겨가면서 서인을 비판하게 되었고, 이것이 선조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된 까닭이었기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게 된다.

정여립의 이러한 변신은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사회에서 반역자적인 의미를 지니게 됨에 따라 부정적인 시각이 대세를 이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정여립은 모악산 앞 제비산에 머물면서 죽도(竹島)에 서실을 짓고 강론을 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며 인근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다. 신분의 제약이 없는 이러한 조직은 급속도로 호남을 중심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이러한 영향은 1587년 손죽도를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선비들 학문 논하던 '한림대터'

최고 조망 금강·마이산 한눈에

한 서린땅에 선 천반낙도의 산

구량천·죽도·기암괴석 매력적

그러던 중 1589년 10월,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 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그가 대동계 사병을 이끌고 도성으로 와서 선조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고 고변(告變)하였다. 선조는 이들의 세력이 막강함을 우려하여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관련자 80명이 압송되었으며 점차 범위가 확대되어 2년간 국문장이 열렸다. 옥사는 1천명의 희생자를 냈다. 당시 형문을 담당하던 위관은 송강 정철이었다 한다.

그런데 정여립의 죽음과 관련해 의견이 분분하게 나뉜다. 천반산에서 자살을 했던 것인지 단순히 죽도를 방문했다가 관군에게 잡혀 죽었던 것인지에 대해선 기록이 제각각이다. '동서만록'에 따르면 정여립은 평소에 천반산 아래 죽도를 자주 찾았기에 그를 죽도선생이라 불렀다고 하며, 더욱이 역적도 아니었기 때문에 죽도로 피난 간 것이 아니라 평소처럼 죽도의 비경을 즐기려고 나왔다가 관군에게 잡혀 억울하게 죽었을 뿐 자살로 조작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만을 남긴다고 했던 과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정감록이 정한 십승지를 품은 천반낙도(天盤落桃)의 산

천반산 최고의 전망대인 한림대터를 지나 성터로 가니 천반산 안내판과 표지석,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죽도방향으로 가야만 단종 때 왕위찬탈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송 판서가 수도하였다는 송판서굴을 볼 수 있기에 그리로 향한다. 가파른 내리막길로 이어지는 송판서굴에 도착하자 금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아찔한 절벽이 버티고 있다. 할미굴과 연계해서 한번쯤은 지나가야 할 곳이다. 왔던 길을 거슬러 깃대봉으로 향하자 정여립이 친지들과 바둑을 즐겼다는 말바위를 지나고 분재와 같은 노송 한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전망바위를 지나니 정상석과 벤치가 놓여 있는 천반산 정상이다.

시원스럽지 못한 조망에 다소 실망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발걸음을 옮기면서 만나는 덕유산 향적봉에서 발원한 구량천의 어지러운 물줄기와 죽순처럼 솟아 오른 죽도와 그 주변의 기암괴석은 가던 이들을 잡아끄는 매력이 넘쳐난다. 누구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는지 귀를 쫑긋 세운 마이봉의 자태도 보석처럼 빛나는 하늘금에 한 부분으로 솟아 있으니 가히 절경이 따로 없다.

이후 먹개골을 통해 원점회귀 산행을 마치기까지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팥죽땀 뚝뚝 흘려야 하는 더운 여름날씨만 아니라면 누구나 다녀갈 수 있는 산행지로 제격이다. 그러나 동양 최초의 공화정치를 꿈꾸었던 진보적 사상가 정여립을 다시금 떠올려 주길 바란다. 지역적 정서와 정치적 배경을 달리하며 칼날을 거두지 않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너무나도 가슴 아픈 과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조선 왕조를 창건한 태조 이성계 조상들의 고향 전주, 그런 이유로 풍패지향(風沛之鄕)이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을 받았던 전주를 비롯한 호남이 하루 아침에 반역의 땅으로 매도되어 버린 역사적 배경이 이곳 천반산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