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이후 인천은 중국과 경제협력사업을 활발히 추진해 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단둥산업단지 조성사업이다. 인천지역 업체들의 중국진출을 지원하겠다며 의욕적으로 출발했던 이 사업은 시작 10여년 만에 중단됐다. 하지만 지난해 단둥축구화 공장 설립으로 인천의 중국경제교류협력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한중 양국은 올해 수교 20주년을 전후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최근 공식협상을 시작한 자유무역협정(FTA)이 그것이다. 거대 중국시장 진출이 초읽기에 들어간 만큼 인천도 인천공항과 인천항, 경제자유구역을 바탕으로 환황해권 시대를 주도적으로 열어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위치도


■실패했던 인천의 중국진출

1997년 2월 19일 중국 현지에 인천 단둥산업단지 지원본부가 개설됐다. 이 시점은 중국의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이 사망한 날짜이기도 하다.

당시 발행된 경인일보 보도(1997년 2월 24일자 1면)를 보면, '등소평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인천의 대중국 진출사업은 차질없이 추진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단둥산업단지는 시가 53억4천만원을 들여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연강개발구 금천공업지구내 44만여㎡의 부지에 대한 토지사용권 계약을 맺었다.

도로, 상·하수도 설치 등 기반시설 조성도 함께 진행했다. 또 기업체 입주수속에 대한 행정지원과 현지 시장정보 제공, 투자상담 등을 병행했다.

시가 이 사업을 추진하면서 투입한 예산규모도 2001년 7천600여만원 수준에 불과하던 것이 2004년엔 1억9천900여만원으로 늘었다.

2001년까지 46개 업체에 37만9천600여㎡에 대한 분양을 마치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둥산업단지 조성사업은 이후 표류했다. 시의 준비부족과 기업들의 입주기피가 주된 원인이었다. 2001년 말까지 총 46개 업체에 분양을 마쳤지만 2004년 8월까지 실제 이 곳에 입주한 업체는 8개에 불과했다.

중국 정부로부터 "입주지연에 따른 무상환수 조치를 취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받기도 했다. 결국 시는 같은 해 46개 필지 가운데 16개 필지를 다시 단둥시에 팔았다. 시는 지속적으로 단둥산업단지에 대한 국내 업체들의 입주를 독려했지만 업체들의 입주는 이뤄지지 않았고, 단둥시로부터 '분양 뒤 2년 안에 입주하지 않으면 해당부지를 무상환수한다'는 내용의 독촉을 받았다.

마침내 시는 2006년 단둥산업단지 조성사업 정리를 선언했다.

시는 중국 톈진(天津)에 '천진무역센터' 건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1996년 11월 (주)대우, 천진 태달 집단유한공사 등과 함께 '천진 인천개발공사'를 설립한 시는 톈진시 허핑구 남경로 천륭리 일대 1만5천여㎡에 지상 51층 지하 3층 규모의 무역센터를 2000년까지 완공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사업추진을 위해 총 234억2천600만원을 확보해 놓기도 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는 무역센터 건립사업을 더 이상 어렵게 했다. 시는 1998년 이 사업을 전면 백지화했다.

 
 
▲ 송영길 시장이 지난해 준공된 단둥 축구화 공장 현지에서 근로자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 /인천시 제공

■단둥 축구화공장 새로운 모델 될까

이후 한중 경제교류협력 교류회 등을 통해 인천과 중국간 경제협력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시는 축구화공장을 통해 지금까지 도입된 적이 없는 새로운 형태의 '남북경협 모델'을 중국 단둥에 적용하려 하고 있다.

시가 투자해 단둥에 수제 축구화공장을 세우고, 북한의 근로자가 그 공장에서 생산하는 방식이다.

국내의 수제축구화 기술자 2명과 북한 근로자 25명이 근무하는 이 공장에서 생산될 연 3만켤레의 축구화는 일부가 북한으로 지원되고 국내와 중국 현지에서 판매될 예정이다.

송영길 시장은 당시 공장 준공식 축사에서 "남측의 기술·자본과 북측의 노동력이 합쳐져 중국에 진출한 최초의 제조업체인 이곳 공장이 남과 북, 중국 3국간 교류에 중요한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인 데다 제품의 판로확보 등이 불투명해 사업의 성공여부는 아직 미지수인 상태다.

/이현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