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이렇게 다가오는가 보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사람 중 한 명. 그를 한 번도 대면한 적 없건만, 1991년 우연한 기회에 그의 아들들을 해외에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20여 년. 2012년 8월, 그의 구멍 뚫린 유골이 신문지상을 장식했다. 1975년에 '의문사'한 그를 그렇게 만났다.
대기업 재직 중 싱가포르 발령
장선생 아들과 만나 인연 맺어
임원직 물러나 '진실찾기 여정'
'장준하 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 정세일(57) 상임공동대표는 장준하 선생의 유골이 세상에 드러난 뒤 유족을 찾아가 이 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제물포고를 졸업한 정 대표는 대학에 들어가서 장준하를 본격적으로 알게 됐다.
1975년 서울대 화학과에 입학했는데, 그 해 8월 장준하는 세상을 떠났다. 당국은 등산 도중 추락사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정보기관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암살'이라고 온 나라가 아무리 떠들어도 자꾸만 묻히고 잊혔다.
정 대표는 대학을 졸업한 뒤 코오롱상사(지금의 코오롱그룹)에 입사했고, 1991년에 싱가포르 발령을 받았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장준하의 셋째 아들이 싱가포르에 살고 있다고. 싱가포르에서 첫째·셋째 아들을 만났다. 아들들에게 아버지 장준하에 대해 물어봤다.
'실족사라고 하는데, 어떻게 보느냐'고. 아들의 대답은 '산에서 추락사한 사람이 어떻게 옷도 깨끗하고, 시계도 멀쩡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렇게 장준하 가족과 인연을 맺었다.
지난 10월 19일 창립한 '장준하 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상임고문을 맡는 등 정치권 인사들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참여하고 있다.
'기업의 별'이라는 상무까지 올라간 뒤 퇴직하고, 2011년 코오롱의 고문직까지 내려놓은 정 대표는 최근 이동통신사들의 '횡포'에 맞서는 일도 새로 시작했다고 했다. 정 대표는 또 학교급식 문제 등에 대해서도 챙기고 있으며, 기독교 사회운동 단체인 생명평화기독연대도 이끌고 있다.
"저는 대학 다니면서 마음먹은 생각을 실천하면서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코오롱에 입사해서는 5년밖에 안 되었는데, 한겨레신문을 중역실에 넣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산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정진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