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미군클럽 음악, 김홍탁 등 그룹사운드 영향
송창식 배출하고 심수봉 '남자는 배…' 배경이 되기도
1980년대 '록' 붐일어 록페스티벌·루비살롱 탄생시켜
인천 월미도 문화의 거리 한쪽에 서 있는 '이별의 인천항' 노래비(1999년 10월9일 제막) 하단에 적힌 글(김윤식 작)은 60년 전 탄생한 이 노래를 이렇게 술회한다.
'100여 년 전 이 나라 최초 이민선의 노래 소리에 피눈물 뿌리던 곳이요, 8·15광복, 6·25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운 사람, 사랑하는 피붙이와 모질게 이별하던 마당이었으니 그 절절한 인간사는 두고라도 뜬구름, 푸른물, 해풍에 쓸리던 갈매기 하나인들 어찌 서러운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랴.
오늘, 비록 한 시절을 유행하다 사라진 노래이나 이 고장 인천항의 정한을 실어 세인이 부르던 곡 '이별의 인천항'을 이 비에 새겨 다시 한번 그때 그 시절의 인천을 추억해 본다'.
# 송창식과 심수봉
1947년 인천에서 태어난 송창식은 인천중학교 재학 시절 경기도 음악 콩쿠르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이후 서울예고 성악과에 진학했지만 가정 형편상 학업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1967년 트윈 폴리오를 결성하고 쎄시봉에서 노래했으며, 1970년 솔로로 데뷔했다. 이내 '고래사냥'과 '피리 부는 사나이', '왜 불러' 등 명곡들을 선보였다. '한번쯤', '우리는', '담배가게 아가씨', '가나다라마바사', '참새의 하루' 등 지금도 송창식은 평단으로부터 새롭게 평가받고 인정받는 가수다.
1955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심수봉(본명·심민경)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뇌신경 인프레'라는 병을 얻고 무의도에서 요양하며 지냈다. 인천 인화여고를 다녔고, 그 무렵에 드럼 등 다양한 악기를 배웠다. 대학가요제를 거쳐 스타가 된 그는 인천의 '수봉산'과 같은 예명을 쓰면서 일약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가수가 됐다.
심수봉의 대표곡 중 하나인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는 1984년 어느 날 인천항에서 이별하고 슬퍼하는 지인들을 보고 만들어졌다.
사람들의 아픔을 달래 줄 노래가 인천항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는 음반을 발표할 때마다 새로운 노래를 직접 만들어서 수록했는데, 대부분 자신이 작곡·작사한 노래가 히트했다. 이와 같은 음악적 재능을 겸비한 심수봉은 한국 가요계 제1세대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손꼽힌다.
# 록과 헤비메탈
1997년부터 인천 록밴드들의 아지트였던 '락캠프' 덕에 인천 부평구 십정동에는 서울의 홍대처럼 실력파 음악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락캠프의 정유천 사장은 인천밴드연합 회장으로, 지역 내 음악인들을 규합하는 역할도 맡았다. 2006년 락캠프가 문을 닫자, 이에 아쉬움을 느낀 30대 초반의 한 남자는 부평 모텔촌에 루비살롱을 열었다.
이규영 대표가 이끄는 인디 레이블 루비살롱은 수년 사이 급격히 성장했다. 루비살롱의 활동 영역이 서울 홍대 쪽으로 치우치는 근래 상황에서 2011년 락캠프가 부활했다.
인천의 록 붐은 1980년대 일었다. 1987년 강변가요제에서 가창상과 동상을 수상한 '티삼스'는 인하공업전문대학 그룹사운드였다. 티삼스는 1988년 앨범을 내기도 했지만 그들의 '매일 매일 기다려'는 처음이자 마지막 히트송이 되었다.
이후 티삼스의 보컬 김화수는 솔로로 데뷔했고, 드러머 채제민은 그룹 '부활'에서 활동 중이다. 비슷한 시기 인천의 드럼 연주자 홍진규는 '블랙신드롬'에서 활동하다가 이전의 소속 그룹이던 '사하라'로 돌아갔다.
사하라를 필두로 터보, 제로지, 사두 등은 1990년대까지 인천의 록과 헤비메탈을 전국에 알렸다.
당시 인천에선 대형 록페스티벌이 시도됐다. 공항(에어포트)과 항만(시포트), 정보(텔레포트) 등 세 포트를 명칭으로 정한 '송도 트라이포트 록페스티벌'이 탄생한 것이다.
국내를 대표하는 노이즈 가든, 크래쉬, 자우림, 윤도현 밴드, 시나위, 크라잉 넛, 부활을 비롯 해외에선 딥 퍼플, 드림 시어터, 프로디지 등이 한국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축제기간 내내 쏟아진 장대비가 축제의 성공을 방해했다.
트라이포트 록페스티벌을 근간으로, 2006년 비즈니스와 레저가 더해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 생겼다. 인천에서 대형 대중음악 축제의 막이 본격적으로 열리는 순간이었다.
# 항구와 한국전쟁
'이별의 인천항'(세고천 작사·전오승 작곡)은 한국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4년, 인천 출신의 가수 박경원에 의해 세상의 빛을 봤다.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인천의 사랑을 그린 인천인의 노래 '이별의 인천항'이 태어난 것이다.
'이별의 인천항'을 비롯해 1960년 반야월이 노랫말을 쓴 '인천 블루스'(이재호 작곡·백일희 노래), 배호가 부른 '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2011년 10월 인천 연안부두 해양광장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1979년 안치행이 만들고 김트리오가 부른 '연안부두' 등은 항구의 이미지를 더욱 애절하게 만든다.
이처럼 인천은 귀환의 기쁨보다 이별의 아픔을 그린 노래에 더 자주 등장했다. 항구도시이면서 한국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한국전쟁 이후 부평의 일부는 미군수지원사령부의 땅이 됐다.
동인천역 인근 양키시장(송현자유시장)은 각종 원조품과 군용품을 파는 곳으로 유명세를 타며 호황을 누렸다. 미군의 존재는 노래에도 영향을 끼쳤다. 1960년대 들어 미군 클럽에서 연주 활동을 하며 기량을 닦은 음악인들이 가요시장으로 나오게 된다. 서양의 팝이 한국 대중가요의 중심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인천에는 당시 그룹사운드를 연 주인공들이 다수 존재했다. '가왕' 조용필이 꼽은 한국 최고의 기타리스트이기도 한 김홍탁은 친구 집에서 미군 병사의 연주를 훔쳐보고는 기타에 매료됐다. 그는 미군악대 하사관에게 기타를 배웠다.
동산중학교 3학년 때 밴드를 조직했으며, 동산고 입학 후 인천의 미군 클럽 등을 오가며 밴드활동을 했다.
대학 진학 무렵 이미 기타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고, 당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밴드 키보이스(Key Boys)가 그를 스카우트했다. 1963년 결성된 키보이스의 멤버는 김홍탁 외에 윤항기, 차중락, 차도균, 옥상빈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장안의 스타가 됐으며, 한국 그룹사운드 역사의 맨 앞을 장식했다.
동산중 밴드부에서 처음 악기를 잡았다는 김대환이 신중현과 함께 결성한 애드 훠(Add 4), 인천 화수동에서 태어난 김명길이 보컬과 기타를 맡아 1969년부터 활동한 데블스도 그룹사운드를 연 주인공들이다.
인천에서 태어난 구창모도 미군 클럽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부평의 미군 클럽에서 연주하던 사촌형을 통해 초등학교 때부터 해외의 음악을 접하고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훗날 구창모는 블랙테트라를 거쳐 송골매에서 스타 반열에 오르고, 솔로 가수로도 성공한다.
'푸른 하늘에 바다위 은빛날개 아름다운 푸른 바다 꿈꾸는 그대 모습 목백합 향기에 빛나는 I Love 인천, 빛나는 태양 춤추는 파도 너와 나 푸른 꿈 안고서 멀리 함께 달려가자 저 깊은 바다를 품은 도시로…'.
2009년 녹음을 마치고 음반도 출시된 'I Love 인천'의 첫 소절이다.
안길원 무영건축 회장은 '인천 노래' 만들기를 추진했고, 'I Love 인천'(인순이 노래)과 트로트풍의 '인천에 가자'(문보라 노래) 등 네 가지 스타일의 곡이 탄생했다. 두 곡은 그해 12월 새얼문화재단이 개최한 '가곡과 아리아의 밤'에서 인천시민들을 상대로 첫 선을 보이기도 했다.
인천 출신의 중견 싱어송라이터 백영규는 2011년 스토리가 있는 이색 콘서트를 개최했다. 공연을 이끌 가수이자, 기획·연출까지 맡은 백영규는 순수하고 수줍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콘서트 '지금 몇시죠?'를 기획했다. 콘서트의 배경은 1971년 인천 신포동이었으며, 배우 윤철형이 DJ로 출연하기도 했다.
1970년대 라디오와 DJ문화, 연극적 요소까지 접목시켜 인천이 담긴 콘서트를 만들어 낸 것이다. 백영규는 '지금 몇시죠?'와 지역의 언더그라운드 가수들과 함께하는 '공감 콘서트'를 지난해까지 정기적으로 열었다.
가수 조관우는 최근 인천의 대표 응원가로 사랑받고 있는 '연안부두'를 편곡해 직접 부르기로 했다. 조관우는 '2014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인천시에 도움을 주고 싶어서 응원가 제작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트로트풍의 '연안부두'를 댄스곡 형태로 바꾸기로 했다. 또 원곡의 가사를 일부 변경, 아시안게임의 성공적 개최를 바라는 내용을 넣기로 했다.
글 = 김영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