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마다 고려·조선 임금 엇갈려
강화에 깃든 민족 수난 역사 대변
어민에 조기잡는 법 알린 '임경업 장군'
연평도선 '바다 수호신'으로 모셔
평화와 만선기원 풍어제 매년 열어
이윤생이 의병 이끌고 전사한 '낙섬'
매립으로 사라져 바다정서도 퇴색
지리적 배경 이야기 잊혀질까 걱정
인천에도 옛날 옛적부터 전해지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지명의 유래, 처녀·총각의 사랑 이야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이야기, 부모를 극진히 모신 효자에 관한 전설 등이다. 이 중에서도 인천이 아니었다면 전해지지 않았을 인천만의 이야기가 있다.
연평도 사람들에게 조기잡이를 처음 알려준 '임경업 장군', 강화로 피란길에 오른 왕을 배에 태우고 염하를 건너다 억울하게 죽은 '사공 손돌', 병자호란 때 의병장 이윤생과 의병들이 청나라 군사에 맞서다 전사한 '낙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이야기는 '바다'와 '섬', '전쟁'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이 같은 전설은 문헌으로도 전해지지만, 책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전하는 이야기도 있다. 경인일보는 위의 세 가지 전설을 '책'이 아닌 '사람'에게서 찾기로 했다. '사공 손돌' 이야기는 전 덕신고등학교 교감 김경준(66)씨가, '임경업 장군' 이야기는 그를 '신(神)'으로 모신다는 서해안풍어제 보존회 김혜경(52·여)씨가 들려줬다. '낙섬 이야기'는 인천 출신 시인 김윤식(67)씨가 들려줬다.
<손돌은 고려 혹은 조선시대 뱃사공으로 지금의 강화 광성보와 김포 덕포진 사이의 바닷길인 '염하'를 주로 오갔다고 한다. 어느날 강화도로 피란길에 나선 왕이 염하를 건너야 했는데, 물살이 거세 건너지 못했다.
왕의 일행을 지켜본 주민들은 손돌 사공을 추천했다. 손돌의 배를 타고 염하를 건너던 왕은 험한 물살에 겁을 먹어 '손돌이 나를 죽이려는 첩자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신하들에게 손돌의 목을 치라고 명령했다.
손돌은 죽기 전 바가지를 물 위에 띄우면서 '물길이 험하니 바가지를 따라 배를 몰아달라'고 했다. 안전하게 강화에 도착한 왕은 그제서야 손돌을 죽인 것을 후회하며 손돌의 장사를 후하게 치러줬다. 손돌이 죽임을 당한 때는 음력 10월 20일. 지금도 이날만 되면 큰바람이 불어와 이를 '손돌바람' 또는 '손돌추위'라고 한다.>
지난 15일 손돌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강화도에서 전 덕신고 교감 김경준씨를 만났다. 1987년 강화읍에 있는 덕신고에 부임하면서 강화와 인연을 맺은 김씨는 현재 '강화 향토사 박사'로 통하고 있다.
김씨는 손돌 이야기에 앞서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손돌의 묘가 있는 김포시 덕포진으로 안내했다.손돌 묘지 앞 안내판에는 손돌 전설이 담겨 있었다. 안내판은 손돌을 죽인 왕을 '고려 고종'이라고 했다.
손돌 전설은 몽골(원나라)이 침략했을 때 고려 고종이 1232년 강화로 천도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명이었다. 김씨는 덕포진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강화 광성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광성보 안내판에는 손돌을 죽인 왕이 '조선 인조'라고 나와 있었다. 1627년 후금의 조선 침략 당시 인조가 강화로 몸을 피했을 때 발생한 일이라는 것이다.
"전설이란 것이 원래 있음직한 일을 전하는 건데, 거짓말이라도 서로 입이 맞아야 하는 것 아니겠어. 이렇게 강화군과 김포시가 각각 다르게 해놓은 것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어 꼭 보여주고 싶었어. '고려의 어느 왕' 또는 '조선의 어느 왕'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어."
김씨는 손돌 이야기가 강화가 갖고 있는 수난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화도는 국난 극복의 역사를 갖고 있어. 강화는 고려·조선의 피난처로, 민족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많은 왕과 왕족이 이 땅을 밟았을 텐데, 아마 그 와중에 어떤 왕과 손돌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강화도의 지리적·역사적 배경과 함께 극적으로 재구성했겠지. 백성들은 고통 속에 있으면서 왕에게 목숨까지 바쳤고, 그게 바로 손돌이라고 볼 수 있는 거야."
<병자호란 당시 의주 부윤 임경업 장군은 인조가 청나라에 무릎을 꿇은 치욕을 씻고자 명나라와 손을 잡으려 했다. 상인으로 위장을 하고 바닷길로 명나라에 잠입하려던 서해 한가운데서 식량과 물이 떨어지자 가까운 연평도에 배를 댔다.
임경업 장군은 선원들에게 가시나무를 꺾어 간조 때에 맞춰 안목어장터에 꽂아 놓으라고 했고, 가시나무엔 조기가 수없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연평도 사람들은 조기잡는 법을 배우게 돼 연평도 근해에서는 파시(波市·생선시장)가 열렸다. 지금도 연평도엔 임경업 장군의 사당이 모셔져 있고, 인천에선 매년 임경업 장군에게 만선을 비는 '서해안 풍어제'가 열리고 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인천의 서해안 풍어제는 황해도 지방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임경업 전설의 배경이 되는 연평도가 인천 내륙보다는 황해도와 더 가까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82-나호 서해안풍어제' 보유자인 김금화 선생도 황해도 연백이 고향이다.
서해안풍어제 보존회 사무실은 인천시 남구 주안동 경원초등학교 맞은편의 한 상가 건물에 있다. 지난 12일 이곳에서 서해안풍어제 이수자인 김혜경씨를 만났다. 김씨는 이른바 '무당'이다. 20여년 전 '신내림'을 받고, '장군님(임경업)'을 모시고 있단다.
김씨는 서해안 풍어제 '전성기'인 1990년대 초반을 떠올렸다.
당시만 해도 연안부두, 소래, 덕적도에서 선주들이 돈을 모아 풍어제를 지냈는데, 지금은 배도 많이 줄었고 종교적인 문제도 얽혀 있어 많이 쇠퇴했어요."
서해안풍어제 보존회가 매년 6월 연안부두에서 주최하는 '배연신굿'은 올해 열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배연신굿'은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서 하는 풍어제인데, 올해는 보존회가 배를 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규모가 커 주로 바지선을 이용하는데, 안전상의 이유로 해경 등 관련기관의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김씨가 말하는 인천 바다는 '기가 센 바다'다. 인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쟁에서 숨진 수병들이 눈을 감지 못하고 구천을 떠돈다고 한다.
"3년 전 천안함 사태가 터지고 수십명의 장병이 안타까운 일을 당했을 때 혼을 달래 주려고 '진혼제'를 열려고 했는데, 실제로 하진 못했어요.
이제는 고기잡는 배만 다니는 것이 아니니까 임경업 장군의 역할도 조금 달라졌다고 보여요. 요즘 연평도 등 서해 섬이 안보 문제로 시끄럽지만, 연평도에 모셔진 임 장군님이 잘 지켜주실 거라 믿습니다."
<인천 남구 용현동 토지금고 시장 일대에는 '원숭이섬'이라고 불리던 '낙섬'이 있었다. 1970년대 바다를 매립하면서 낙섬도 같이 사라졌지만, 조선시대 인천도호부에서는 이 곳에서 서해바다 용왕에게 고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낙섬에는 의병장 이윤생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천 출신 이윤생이 의병을 이끌고 청나라 군사와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곳이 낙섬이었다는 이야기다.>
지난 14일 중구 신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인천 출신 시인 김윤식씨. 그는 "낙섬이 사라지면서 바다에 대한 시민들의 정서도 사라졌다"고 했다.
김씨가 기억하고 있는 낙섬은 용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섬이 아닌 '놀이터'였다. 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낙섬 옆으로는 염전에 물을 대는 저수지가 있었다.
이곳이 학생들의 수영장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낙섬 제사는 조선시대 후기 폐지됐다. 일제가 없앴다는 이야기만 전해져 내려올 뿐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 인천사람들은 바다를 가까이 접할 수 없었지만, 그때는 낙섬으로 가는 축대에서 석양을 바라보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곤 했지. 지금은 인천이 바다도시인데도 배가 어떻게 들어오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한반도 모습이 호랑이든 토끼든, 인천은 배꼽에 위치해 있어. 서울이나 평양, 개성이랑 그렇게 멀지 않았단 말이야. 지리적 요충지다 보니까 이윤생 이야기처럼 군사적으로도 인천이 외침을 당하기 쉬운 지역이었던 것 같아. 또 각종 전설들이 조선시대 이후로 만들어진 것을 보면 해양술이 발달하면서 이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어."
김씨는 지금의 인천 바다가 철책과 항만시설로 가로막혀 있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시민들이 바다를 가까이 접하지 못하면서 자연스럽게 바다와 관련된 옛 이야기도 같이 잊힐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군산이나 다른 지역은 바다가 삶에 들어와 있는데, 지금 인천사람들은 바다와 별개야. 지역정서에 바다가 들어와 있지 않은 것 같아. 바다는 경제적 가치로는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가치가 있잖아. 어린 학생들이 바다를 보면서 꿈을 키우는 것, 그게 바로 교실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인천을 제대로 배우는 것 아니겠어."
글 = 김민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