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 건축사, 추억을 벽돌 삼아 공동주택 설계
직사각형 모양 다락방, 아이들 마음놓고 뛰놀고
테라스 가장자리 따라 텃밭 가꾸며 '행복 수확'
커다란 창 밖 운치있는 풍경, 전원생활 기쁨 두배
소녀는 집 안 마당에 어슴푸레 빛나던 라일락 나무의 그윽한 향을 잊지 못했다. 1970, 80년대 흔히 볼 수 있는 아담한 양옥집에 라일락 나무 한 그루 서 있을 만한 자그마한 마당이었지만, 집은 언제나 소녀에게 노스탤지어였다. 그리고 집은 누구에게나 그런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간과 사람이 만난 네 번째 집은 광주시 목현동에 위치한 '라도무스'다. 라일락 나무 향을 그리워한 소녀가 집을 짓는 건축사가 돼 설계한 타운하우스형 빌라다.
라도무스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주변의 수많은 빌라와 주택들 중에서도 한 눈에 저 곳이란 걸 직감할 수 있을 만큼 감각이 돋보이는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공동주택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검은색 화강암으로 1층을 마무리했다. 건물 윗 부분에는 검은색 징크판을 덧대 소재는 위아래 검은색 포인트를 더하니 건물의 통일성을 높이면서도 모던한 분위기가 한층 돋보이는 감각적인 집이 탄생했다.
사실, 검은색 화강암이나 검은 징크판은 세련되고 현대적인 느낌을 표현하고픈 단독주택들이 주로 사용하는데, 가격이 결코 저렴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아파트, 빌라와 같은 공동주택에는 쉽게 사용하지 않는 재료다.
김 건축사는 "단독주택에 대한 소망이 강했던 만큼 설계를 하다 보면 애초의 계획과 다르게 설계상 늘어나는 항목들이 많아져 비용이 증가된다"며 "대부분의 단독주택이 짓는 비용만 억단위로 들어가다 보니, 선뜻 시작하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단독주택을 설계하면서도 그는 어린 시절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추억 속의 집이 어느새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됐다는 회의감이 들었다.
김 건축사는 "부유층들끼리만 향유했던 음악, 미술 같은 예술분야도 요즘은 우리 같은 일반 서민들뿐 아니라 저소득층도 향유할 수 있을 만큼 사회가 성장했다"며 "이제 우리 사회도 건축이 문화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서민 주택도 단독주택만큼의 퀄리티로 지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때마침 빌라를 설계해 달라는 제안을 받은 김 건축사는 부지를 보고 고민에 빠졌다. 잔잔히 흐르는 개울과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 산을 배경삼은 부지에 빨간 벽돌로 쌓아 올린 흔해 빠진 빌라를 세운다는 게 마뜩지 않았던 것.
이참에 그동안 가져왔던 철학을 밑거름 삼아 단독주택 못지않은 공동주택을 세워보자는 결심을 했다. 그런 과정을 바탕으로 지금의 라도무스가 탄생됐다.
라도무스가 단독주택 못지않은 기능을 갖춘 건 외관뿐만이 아니다. 라도무스 4층의 독특한 구조에서도 그 매력은 빛을 발한다. 4층 주택은 이른바 다락방이 있는 집이다.
집안에 다락과 넓은 테라스가 존재하는 복층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 방에 설치된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직삼각형 구조의 다락방이 나온다.
지난해 10월에 입주한 김정숙(35·여)씨는 다락방과 테라스를 훌륭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5세, 7세 아이를 둔 김씨는 다락방을 아이들 놀이방으로 만들었다.
한쪽 벽에는 동화책이 잔뜩 담긴 책장을 설치했고 다른 한쪽에는 아이들의 텐트와 장난감이 정리돼 있다.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나뭇잎 스티커는 아이들 손때가 탄 소중한 추억이기도 하다.
더불어 다락방 전면에 위치한 김씨의 테라스는 여지껏 가봤던 단독주택들의 정원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테라스 전체를 원목으로 깔았고 그 위에 오두막과 유사한 넓은 평상을 설치했다. 테라스 가장자리를 따라 흙을 덮어 미니장미와 채소를 심었다.
김씨는 "공동주택답지 않은 세련된 외관 디자인에 끌려 구경왔는데, 4층의 복층구조를 보고 반해서 계약했다"며 "단독주택에 살고 싶은 소망이 늘 가슴속에 있었는데 이 집을 보는 순간 그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 곳에 이사온 뒤 무엇보다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생겨 가장 뿌듯하다는 김씨는 "집에 오면 아이들이 다락방부터 올라온다"며 "따로 비용을 들여 나무데크를 설치했는데 볕이 좋은 날, 아이들과 돗자리 깔고 함께 누워있으면 뒷산이 그대로 품에 와 안기는 것 같다"고 행복해했다.
김 건축사도 "일반적으로 공동주택 옥상은 뾰족한 지붕으로 처리해 아무도 이용하지 못하거나 공동으로 이용해 엉망이 돼 버리는 경우가 많다"며 "옥상이란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단독주택에서만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색다른 공간을 연출해 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방의 창문을 거실 창만큼이나 크게 설치한 것은 전원형 단독주택을 지으려는 사람들 중 열이면 열, 시원한 창에 대한 꿈이 있다는 그동안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특히 라도무스가 자리한 곳이 뒷산의 경치가 전원생활의 매력을 한껏 느끼게 해 줄 요소가 될 수 있다는 데 착안했다.
또 라도무스는 외단열 공법을 활용해 열 효율성도 높였다. 외단열 공법은 콘크리트벽재 겉면에 단열재를 둘러싸 외부 온도로부터 내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김 건축사는 "단열재가 밖에 있어야 온도조절에 유리하기 때문에 단독주택들은 대부분 외단열 공법으로 설계를 한다"며 "비용적인 부분에서 부담이 되겠지만, 내 집을 갖고 싶어 이 곳으로 온 입주민들에게 보다 나은 집을 선물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그의 설명을 듣고 실제로 살고 있는 입주민들을 만나 보니, 문득 진심을 짓는다던 한 건설업체의 TV광고가 떠올랐다. 누구나 좋은 집을 향유해야 한다는 건축사의 진심이 듬뿍 담겨 있는 라도무스는 몇십억원을 들여 멋지게 설계된 여느 단독주택 못지않게 훌륭한 보금자리였다.
"내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으면 마음이 편안한 것처럼, 집도 나한테 꼭 맞아야 편안함을 느낄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김 건축사의 건축 철학처럼, 흐린 날씨에도 라도무스는 그녀 특유의 섬세하고 자상한 진심이 가득 감싸고 있는 듯 평온해 보였다.
글=공지영기자
사진=조형기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