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구·공장 포화 탓 연안 개발후 혐오시설까지 '자리'
송도 공유수면 매립에 어촌계 터전잃고 조개·철새들 줄어
소규모 섬들도 함께 사라져… 퇴색된 문화적 가치 아쉬워
'갯벌과 매립'의 역사를 보면 인천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까지 왔는지를 알 수 있다. 인천은 갯벌을 메워 땅을 만들었고, 그 곳에는 아파트와 공장, 심지어 쓰레기매립장과 발전소 등이 들어섰다.
사람들이 갯벌의 생태적·경제적 가치와 보전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시기는 연안관리법과 습지보전법이 제정된 1990년대 후반.
그 전에도 갯벌을 보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도시 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묵살됐다. 이들 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인천의 갯벌 매립은 계속됐다.
인천은 갯벌을 매립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나. 항만과 공항, 산업단지, 아파트단지, 경제자유구역(송도·청라·영종) 등을 얻었을 것이다. 잃은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갯벌은 하천을 따라 바다로 유입되는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각종 미생물, 어패류, 철새의 산란지 또는 서식지이기도 하다.
갯벌은 또 자연학습 장소로 이용되는 등 문화적 가치가 있다. 매립사업은 이런 생태적·문화적 가치가 있는 갯벌은 물론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들까지 집어삼켰다.
# 갯벌, 근대·산업·세계화의 '희생양'이 되다
인천의 갯벌 매립은 근대화, 산업화, 세계화로 이어지는 시대 흐름과 관련이 깊다. ┃표 참조
인천에서 갯벌 매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83년 개항 이후다. 일본은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다. 이듬 해 전쟁이 끝난 뒤 개항장 일본조계지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급증하게 된다. 주거 공간이 필요했던 일본인은 서서히 갯벌을 매립하기 시작한다.
1910년,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매립 목적은 주거용지에서 항만·공업·상업용지 확보로 바뀐다. 이 시기에 인천 내항 제1선거(船渠)가 완공되고, 그 북부지역에서 매립사업이 진행된다. 이 곳에는 현재 두산인프라코어, 동국제강, 현대제철 등이 들어서 있다.
매립사업으로 인해 월미도와 소월미도는 하나가 된다. '낙섬'과 용현동·학익동 해안도 육지로 변한다.
매립사업은 광복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잠시 멈췄다가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진행되면서 다시 시작된다.
이때부터 김포갯벌, 남동갯벌, 송도갯벌이 인간의 간섭을 받게 된다. 60~70년대 매립사업으로 서부산업단지, 주안수출산업단지, 가좌동 목재단지, 갑문 등이 생겼다. 동양제철화학의 폐석회 매립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80년대는 갯벌 매립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다. 이 시기에 조성된 대표적인 매립지는 김포간척지(동아매립지)와 남동국가산업단지다. 동아건설은 농림수산부로부터 허가를 얻어 김포갯벌 36.37㎢를 매립했다. 남동산단은 수도권에 산재해 있는 공해 공장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됐다.
90년대 들어 송도갯벌 매립이 시작됐고, 이 곳은 2003년 청라·영종과 함께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다. 송도갯벌 매립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강화도 갯벌을 훼손하는 강화조력발전 건설사업은 제6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반영돼 있는 상태다. 이혜경 인천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인천은 여전히 갯벌 매립이 진행되고 있다"며 "바다가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데, 인지를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 갯벌 매립으로 혐오시설이 인천에 들어앉다
갯벌 매립으로 바다만 오염된 것이 아니었다. 갯벌을 메운 땅에는 회색 연기를 내뿜는 공장들이 들어섰다.
서울이 더 이상 인구와 공장을 수용하지 못하자, 인천연안 갯벌이 개발 대상이 된 것이다. 갯벌 매립으로 산단이 조성된 인천은 서울의 위성도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매립지에 아파트와 공장이 들어선 것은 그나마 낫다.
1970년 일도와 율도에는 복합화력발전소와 한화발전소가 있었다. 김포간척지 사업으로 이들 발전소는 육지에 자리잡게 됐다. 환경부는 1988년 김포간척지 북쪽지역을 넘겨받아 쓰레기매립장을 조성했다.
이 때문에 서울과 경기도의 '쓰레기장'인 수도권매립지가 인천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수도권매립지 때문에 인천시민들은 악취와 분진 등에 시달리고 있다.
1990년대, 한국가스공사 등은 송도 해상을 매립해 LNG인수기지를 건설했다.
# 바다와 멀어지다
과거 인천에는 갯골을 중심으로 연안, 송도, 척전, 동막, 고잔, 소래 등의 어촌계가 형성됐다. 이 중 송도·척전·동막·고잔어촌계는 송도갯벌을 터전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들은 송도국제도시 공유수면 매립이 시작되면서 사실상 어업권을 상실했다. 인천시는 송도갯벌 매립을 추진하는 대신 이른바 '조개딱지'(송도어민생활대책용지 분양권)를 어민들에게 나눠 줬다. 시가 어촌계의 자진 해산을 유도한 셈이다. 이후 많은 어민들이 갯벌을 떠났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송도어촌계 어민들은 승합차를 타고 영종도 갯벌까지 나가 조개 등을 잡고 있다. 황인국 송도어촌계장은 "송도갯벌은 조개와 물고기를 잡아 아이들을 키운 삶의 터전"이라며 "송도갯벌이 사라져 몇 년 전부터는 영종도 갯벌에서 조개 등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고잔어촌계 어민은 30명 정도인데, 이들 모두가 갯벌에 나가지는 않는다. 갯벌에 나가도 조개가 잘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방영애 고잔어촌계장은 "매립으로 흙물이 바다에 들어가 조개가 없어졌다"며 "옛날에는 철새들도 많았는데, 지금은 바다에 가도 새를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매립사업으로 사라진 것은 어민, 조개, 철새뿐만이 아니다. 인천 앞바다의 작은 섬들도 사라졌다.
인천항 축조사업으로 분도, 사도, 낙섬, 소원도가 없어졌다. '괭이부리'라 불리던 동구의 '묘도'는 1910년 매립으로 육지가 됐다. 연수구 '아암도', 남동구 '대원예도'와 '소원예도' 등도 사라졌다. 이후 율도, 청라도, 일도, 장도, 거첨도, 안암도, 가서도 등 육지와 가까운 수십개의 섬들이 육지와 연결됐다.
해안에 산업시설과 항만시설 등이 들어서면서 인천시민들은 바다를 접하기가 어려워졌다. 갯벌 매립이 있었기에 인천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보전'보다 '개발'을 우선시했고, 환경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했다.
백용해 (사)녹색습지교육원장은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갯벌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겼다"며 "갯벌이 인천에 있고, 그 가치를 알면서도 안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글 = 목동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