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박성현기자
중국의 '차오장멘' 단무지·캐러멜과 결합
한·중·일·서양 조화 '인천의 개방성 상징'
1890년대 영국산과 교잡 '강화순무' 탄생
값싼 물텀벙이탕·해장국 노동자 사랑받아


'인천해물전골, 꽃게탕, 전통장어요리, 향토짜장면, 밴댕이회, 물텀벙이(아귀) 탕·찜, 시래기밥 칼싹둑이, 쫄면, 동어튀김'.

인천시는 2011년 '인천 맛기행'이란 제목의 책자를 발간했다. 이 책은 인천해물전골, 꽃게탕 등 9가지 음식을 인천향토전통음식으로 꼽았다.

하지만 인천 토박이, 인천을 연구하는 학자들 생각은 좀 다르다. 이들 9가지 음식을 인천음식이라고 부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인천 출신 김윤식(67) 시인은 짜장면, 냉면, 물텀벙이, 해장국이 진정한 인천음식이라고 했다. 인천발전연구원 김창수(인천도시인문학센터장) 박사는 짜장면, 냉면, 해장국을 인천음식으로 꼽았다.

우선 공통분모로 꼽힌 짜장면을 살펴봤다. 최소 50~60년 인천음식으로 불려온 음식에 대해서도 알아봤다. 음식에 나타난 인천을 찾았다.

그리고 인천 음식에서 '개방성'이란 특징과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 1930년대 초 인천 답동 근처에 있었던 '사정옥'이라는 냉면집. /인천발전연구원 제공
# 개항, 인천음식의 탄생

중국에서 인천으로 들어온 '차오장멘'(炒醬麵)은 일본(단무지), 서양(캐러멜)의 재료와 결합됐다.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짜장면은 중국·한국(인천)·일본 등 동양 3개국과 서양의 만남이 이뤄진 음식. 짜장면 자체가 인천의 개방성을 상징하는 셈이다.

인천시 중구 선린동에 위치한 차이나타운에 '차오장멘'이 들어온 것은 인천항 개항기인 1880년대. 중국 산둥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차이나타운에 모이기 시작하면서 차오장멘이 인천에 들어왔다.

중구 짜장면박물관 관계자는 "짜장면은 산둥지역 화교들이 인천으로 유입되면서 같이 들어왔다"며 "초기 짜장면은 삶은 국수에 된장과 야채를 얹어 비벼 먹는 화교들의 '고향음식'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인천에 온 산둥지방 화교들이 고향 생각이 간절할 때 많이 요리해 먹던 음식이었다"고 설명했다.

짜장면은 된장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의 기호에도 맞아 차이나타운의 명물이 된다. 1930년대 청(淸) 요리 부흥기가 오면서 본격적으로 음식점에서도 팔리기 시작한다. 이때 짜장면과 함께 단무지를 먹으면서 한·중·일의 음식이 결합한다.

해방 이후 1950년대를 지나면서 짜장면은 또 한 번 변화를 겪게 된다. 서양식 캐러멜이 첨가된 춘장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짜장면이 완성된 것이다.

▲ 1948년 9월 '인천관'이라는 인천 배다리 인근에 냉면집. 사진은 노릅 파이어( Norb-Faye)라는 미군이 촬영한 것이다. /인천발전연구원 제공
인천화교협회 고창신(60) 고문은 "짜장면이라는 음식 하나로 동양 3개국과 서양의 만남이 이뤄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에서는 여러 나라의 음식 재료 자체가 결합된 사례도 있다. 인천 강화도 특산물인 순무가 그 주인공. 순무는 삼국시대부터 재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의보감은 순무에 대해 '봄엔 어린잎을 먹고 여름에 잎을 먹고 가을에는 줄기를 먹으며 겨울엔 뿌리를 먹는다'고 기록했다. 이 시기의 순무는 뿌리가 흰색이었고, 맛은 옛날 조선배추의 뿌리와 비슷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순무가 영국의 순무와 교잡(交雜)하면서 강화 순무가 탄생하게 된다. 강화군 농업기술센터에 따르면, 1890년대 영국에서 강화도 해군학교 군사교관으로 파견 온 콜웰 대위가 영국의 순무 종자를 가져와 강화읍 갑곶리의 사택 주변에 심었다고 한다.

콜웰의 순무는 기존의 흰색이 아닌 보라색을 띠었다. 지금 강화 순무의 색깔과 같다. 강화군 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교잡이 쉽게 이뤄지는 순무의 특성상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토종 순무와 영국 콜웰의 순무가 서로 섞이면서 강화만의 독특한 순무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이 시기부터 강화사람들은 밴댕이를 이용한 순무김치를 만들어 먹었다. 영국과 한국이 결합돼 탄생한 강화 순무에 인천의 특산물 밴댕이가 더해진 것이다.

강화도에 30년 이상 거주했다는 김경숙(56)씨는 "어른들 말씀을 들어 보면 외래종인 순무와 밴댕이를 같이 섞어 김치를 담그면서 독특한 맛이 나 많이 해 먹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 인천시 중구 차이나타운에서 수타시범을 보이고 있다. /경인일보 DB
# 공업지역 확대와 노동자 음식 탄생

인천에서 수십 년 동안 사랑받은 대표 음식으로는 '물텀벙이탕'과 '해장국'이 있다. 이들 음식은 개항과 함께 인천으로 몰린 부두 노동자들과 오랜 세월 함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도 남구 용현동에는 '물텀벙이거리'가 있다. 이 거리가 생기기 전 인천의 물텀벙이탕은 '매운탕'과 비슷한 맛을 냈다고 한다. 싼 가격 덕분에 부두 노동자들의 술안주로 사랑받았다.

지금은 다른 생선과 비교해 결코 싸지 않은 물텀벙이(아귀)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못생긴 외모 때문에 버려졌다. '두산백과'는 물텀벙이를 '못생겨 버렸던 생선을 칭하는 말'이라고 정의했다.

그물에 걸려 올라오면 바다에 던져 버렸는데, 이때 '텀벙 텀벙' 소리가 나 '물텀벙'이란 별칭이 생겼다고 한다. 덕분에 물텀벙이는 노동자들이 싼 가격에 먹을 수 있는 대표적 술안주 재료였다.

돈이 없는 노동자들은 소주 한잔으로 식사를 대신했고, 식당 주인이 이들에게 밑반찬으로 물텀벙이탕을 끓여 내놓았다.

김윤식 시인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의 인천역 주변에는 드럼통을 잘라 만든 냄비에 매운탕처럼 끓인 물텀벙이탕 집들이 많았다"며 "당시 막걸리 한 주전자에 80원이었는데, 물텀벙이탕은 100원이었을 정도로 값이 저렴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음식 특성화 거리가 조성돼 있을 만큼 인기 있는 음식이지만, 당시에는 한 끼 식사조차 하지 못했던 부두 노동자들의 애환을 풀어준 것이 물텀벙이였던 것이다.

▲ 중국인의날 짜장면 먹기대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짜장면을 먹고 있다. /경인일보 DB
해장국도 수십 년간 인천에서 사랑받은 음식이다.

새벽이 되면 쌀장수나, 쌀 거간이거나, 객주집 주인이거나, 정미 직공이거나, 목도꾼(무거운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 지게꾼이거나 모두 가까운 술집으로 들어간다.

(중략)"한 잔 주슈!"하면 으레 아침 해장 술국에 막걸리다. 한 사발 쭉 들이키고는 뜨끈뜨끈한 술국밥을 먹는 것이었다.

쇠뼈다귀에 고기가 흐들흐들 붙어있으면 뼈다귀를 핥고, 구수한 콩나물과 조갯살에 선지가 들어 있어 포식 한다.(중략)5전 한 푼을 던지고 나가는 사람은 모두 칠통마당으로 발길을 재촉 하는 것이다.

인천 제1세대 향토사학자인 고일 선생은 '인천 석금'(1955년)에서 '인천식 해장국'을 이렇게 표현했다. 인천식 해장국은 1930년대 인천의 향토음식으로 명성을 높였다.

인천식 해장국은 당시 외국 선원들의 식량 보충을 위해 세워진 인천 도살장(현 동구청 지역) 때문에 보급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 부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고기와 내장이 들어간 형태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김창수 박사는 "(해장국은) 개항 이후 전국에서 몰려든 일꾼들의 간편한 한 끼 식사였다"며 "한 그릇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개항장 부두 노동자들을 위한 음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최초로 쫄면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기계. 지금도 이 기계로 쫄면이 생산되고 있다.
#北에서 온 인천냉면은 '실수로' 쫄면 탄생시켜

분식집 납품 바빴던 '광신제면'
면뽑다가 우동면 틀 사용 계기
버리기아까워 고추장 비벼먹어


북한 냉면은 개항기 인천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됐다. 그리고 '인천 냉면'은 쫄면을 탄생시켰다.

1910년대 인천에 내려온 이북식 냉면이 인천식 냉면으로 재탄생해 전국적인 인기를 끌게 됐다고 김창수 박사는 설명했다.

이북 사람들은 주로 겨울철에 꿩고기가 든 냉면을 먹었다. 이 냉면은 인천으로 넘어왔고, 꿩고기 대신 소고기를 얹어 사철 내내 먹을 수 있는 남한식 냉면이 됐다.

김 박사는 "(북한 냉면이) 개항 후 선원들이 생선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설립한 제빙공장과 도살장 영향으로 남한식으로 재탄생하게 된다"며 "그 후 당시 인천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냉면이 전국에 보급됐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김윤식 시인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20~30그릇씩 나무 판에 싣고, 서울로 냉면 배달을 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쫄면은 냉면 덕분에 '우연히' 인천에서 탄생하게 됐다. 냉면을 만들기 위해 면을 뽑다가 실수로 우동면 틀을 사용한 것이 쫄면 탄생의 비화다.

쫄면을 최초로 만든 것으로 알려진 '광신제면'은 인천 중구 경동에 있다. 광신제면 하경우(56) 사장은 "1968년 당시 농수산물시장도 가깝고, 인근에 분식집이 많아 정신없이 바빴다고 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냉면을 만들기 위해 면을 뽑았는데, 그 전에 사용하던 우동면 틀을 그대로 써 우동 굵기의 냉면 반죽이 나왔다고 한다"며 "이것을 버리기 아까워 공장 앞에 있는 맛나분식에 줬고, 이를 고추장에 비벼 먹은 것이 최초의 쫄면"이라고 설명했다.

이 음식은 이후 쫄깃한 면이라고 해 '쫄면'이라 이름 지어졌고, 신포동 분식점에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글 = 김주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