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부와 명성을 얻은 피카소는 자신의 이러한 지위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도 피카소가 자신의 경쟁자로 인정한 유일한 화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야수파(포비즘)의 창시자인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이다.
피카소는 형태의 해방을 가져온 입체파의 창시자로, 마티스는 색채의 해방을 가져온 야수파의 창시자로 서로 매우 대조적인 듯하다.
하지만 둘은 관심사를 공유하고 각자의 작업에 존경을 보내거나 때로는 질투심을 드러내며, 서로를 인정하는 가운데 우정을 지속해 나갔다.
피카소는 현대미술을 주제로 토론을 할 때마다 "기본적으로 마티스가 있다오"라고 말하곤 했으며, 말년에 마티스의 작품 10점을 구입하여 소장하기도 한다.
당시 평단도 당대의 위대한 지침으로서 두 예술가를 인정했다. 동시대 시인이자 미술비평가로 '초현실주의'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는 이 두 예술가에게서 현대(아방가르드) 미술의 미래를 보았다고 평가하며, 1차 대전이 한창인 1918년 파리의 폴기욤 화랑에서 '마티스-피카소'전을 직접 개최하기도 하였다.
오는 7월 6일부터 3개월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피카소-고향으로부터의 방문'展에는 이 두 거장의 관계를 보여주는 소박하지만 유의미한 작품이 있다. 피카소의 '의자 옆의 누드'는 A4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석판화 작품이다.
작품 속 여자는 옆으로 서서 의자를 짚고 있다. 배는 불룩하고 다리는 짧아서 귀여운 맛이 있다. 옆으로 돌아선 자세의 신체는 반으로 나뉘어 왼쪽은 연두색으로 오른쪽은 하늘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곱슬거리는 머리와 암시적으로 표현된 손은 보라색이다.
작품은 비전형적인 색의 사용이나 대상의 분할과 단순화 기법에서 야수파의 영향을 짙게 드러낸다. 형태의 단순화와 대조적인 색들의 과감한 사용을 회화의 주요 요소로 부각시키며 전통과 과거와의 단절을 꾀한 야수파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마티스 식으로 양감과 조형성을 강조하여 그린 '의자 옆의 누드'는 우아하고 관능적인 여성 신체의 모범적인 표현과는 거리가 있다.
누드는 신화의 내용을 빌어 수백년간 그려진 고전적이고 보편적인 소재였다. 하지만 마티스와 피카소의 시대에 이르러 예술가들은 미술의 전범으로써나 충실한 재현(representaion)의 대상으로써의 누드에서 탈피하여 누드를 새로운 표현 수단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동안 절대시되던 인체의 비례나 이상적인 아름다움은 더 이상 예술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피카소는 이 작품을 통해 야수파의 내용을 탐구하려 했다기보다, 작품을 마티스 식으로 그림으로써 오랫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던 선배 작가에 대한 존경과 우정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디앨런 감독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1920년대를 예술의 황금기로 여기는 미국 소설가 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연히 과거의 파리로 돌아간 영화 속 주인공 길은 당대의 뛰어난 미술품 수집가이자 비평가였던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마침 그녀는 피카소와 작품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마티스와 그보다 12살 어린 피카소와의 만남을 중개한 장본인이다. 이 영화는 수많은 천재 예술가들이 살았던 과거의 찬란한 파리를 재치있게 그리고 있다.
피카소는 마티스 뿐 아니라 다른 동료 예술가, 문인들과 매우 긴밀하고도 발전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 영화를 통해서든 아니든 시대적 배경을 알고 나면, 피카소가 얼마나 촘촘하면서도 광범위한 인적 관계망을 구축했었는지 한결 수월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영리 전시 담당 큐레이터·미술사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