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어 논다. 아이들은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줄도 모르고 그저 신이 나서 뛰어다니고 있다.

학교에 점점 저녁 어스름이 내릴 무렵, "얘야, 그만 놀고 이제 저녁 먹어야지!"하는 어머니의 외침이 운동장을 울린다. 한 아이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아이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고는 얼른 어머니에게 달려간다. 아이들보다도, 놀이보다도 더 좋은, 늘 푸근한 '어머니의 품'이다.

아이는 커서 어른이 됐다. 시인이 된 그는 한국 문단의 큰 나무로 성장했다. 고려대학교를 비롯한 세곳의 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며 수많은 후학들을 시인으로 키워냈다.

시간이 흘러 그는 이제 정년을 맞았고, 50여년동안 떠나 있던 자신의 고향, 지금도 '어머니의 품'이 남아있는 수원으로 돌아올 준비를 한다.

"비록 50여년이 흘렀지만, 어렸을적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학교 운동장과 동네 골목골목을 뛰어다니던 일도 어제 일처럼 장면이 떠오릅니다. 한번도 잊지 않았던 고향, 늘 정겹고 따뜻한 기억이에요."

최동호(65) 고려대 교수는 벌써 몇년 전부터 고향인 수원을 찾고 있다. 아직도 수원에 살고 계신 어머님을 뵈러 자주 찾아오기도 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돌아올 곳을 찾기 위해서다.

최 교수는 화성행궁 근처 자신의 옛집 주변도 둘러보고, 자신이 졸업한 남창초등학교도 몇번이나 찾았다.

▲ 고려대 본관 앞에서 최동호 교수.
오랫동안 동네를 지키고 있는 주민들도 만나보며 빛 바랜 추억들 위에 쌓여있던 먼지를 털어내고 있다.

"그동안 멀리 떠나 있었으니, 이제는 돌아와야죠. 내가 태어나고 자란 수원으로 돌아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할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어요. 그리고 이제 기다렸던 때가 된 것이죠."

최 교수는 올 1학기를 끝으로 1988년부터 25년동안 교수로 몸담았던 고려대를 떠난다.

1966년 국문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된 고려대와의 인연이 길게 이어져, 결국 고려대에서 정년을 맞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있던 연구실이 바로 존경했던 조지훈 선생이 썼던 그 방이다.

이제 그 방에 쌓여있던 책들은 '주인'을 따라 수원 남창동으로 하나하나 옮겨지고 있다. 책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쓰다듬는 최 교수의 눈에 수많은 기억들이 스친다.

"책을 옮길 곳은 구했지만, 아직 살 집은 못구했어요. 이왕이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근처에 집을 얻으려니 쉽지가 않네요. 할 수 없이 몸만 왔다갔다 하면서 일을 하고 있어요."

최 교수는 자신이 자란 수원 남창동에서 지난해 11월부터 '수원 남창동 최동호 시창작교실'을 열고 있다.

올해 3월부터 진행된 제2기 시창작 교실도 지난 10일 수료식을 가졌다. 다음달에는 수원시민들을 위해 '여름 시인학교'도 연다. 덕분에 수원시민들은 문학 복(福)이 터졌다.

"수원에 돌아와 제가 할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바로 제가 키운 문학나무의 씨를 뿌리는 것이지요. 수원에서 문학의 나무가 자라나 경기도를 넘어 대한민국, 그리고 세계에까지 아름다운 문학의 향기를 퍼뜨려 준다면 더 없는 기쁨이 될 것 같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주민들과 막걸리를 나누며 늦도록 문학 이야기를 꽃피우고 있는 최 교수의 얼굴에는 벌써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온 듯 행복이 피어나고 있다.

/박상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