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는 며칠 뒤 올리브 잎을 입에 물고 돌아왔고, 이를 보고 노아는 어디선가 물이 빠져 육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때의 비둘기는 올리브 잎과 함께 희망을 물고 왔던 것이다.
특히 서양 미술의 도상학에서는 비둘기가 후광과 함께 그려지면 성삼위일체에서 '성령'을 의미한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처녀인 마리아에게 그리스도를 회임할 것임을 알리는 회화 '수태고지'에는 빛줄기 사이로 비둘기가 어김없이 날아든다. '성령으로 잉태하사…'를 표현하기 위한 도상학적 수단이다.
오랫동안 꽤나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비둘기의 상징성, 특히 '평화의 새' 비둘기라는 인식은 20세기에 들어 피카소에 의해 다시 한번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피카소는 1944년 10월부터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공산당에 입당한다는 것은 사유재산을 부정한다는 의미보다는 반나치 투쟁에 능동적으로 입장을 취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1949년 1월, 공산당은 피카소에게 그해 파리에서 개최되는 세계평화회의의 홍보 포스터 제작을 의뢰했고, 피카소는 비둘기를 주요 모티프로 선택했다.
어린 시절 말라가의 광장에서 보았던 나뭇가지 위의 비둘기들과 같은 것이었다. 이리하여 1949년 유럽 모든 도시의 담벼락에는 피카소의 비둘기가 나붙게 되었다.
물론 이 때 제작된 비둘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에서는 비둘기가 사회주의와 걸맞지 않는 부르주아 감성이라고 비난했고, 미술평론가 존 버거는 피카소의 비둘기가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표면적이고 일차적으로 그려졌다며, 공산당이 피카소의 명성을 이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주 7월 6일에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개막하는 '피카소, 고향으로부터의 방문'전에는 피카소의 비둘기 작품 2점이 전시된다.
하나는 우윳빛 깃털이 아름답게 돋보이는 '검은 바탕 위에 날아오르는 비둘기'로, 1949년의 평화회의 홍보용 비둘기의 성공 이후 1950년에 제작된 것이다.
피카소는 1950년에 동일한 주제 즉 평화를 표현하고자 일련의 날아오르는 비둘기 판화 작품을 제작하였고, 이 작품은 그 중 완성도가 가장 높다고 평가받는 것이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런던에서 개최되는 제2회 세계평화회의의 포스터용으로 구상하였으나 영국 정부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피카소는 이듬해 1951년, 또 다른 비둘기 작품 '평화의 얼굴'을 완성한다.
피카소는 평화를 주제로 한 석판화 29점을 제작하였고, 폴 엘뤼아르(Paul Eluard, 1895~1952)가 작품들에 대해 시로 코멘트를 붙인 것을 엮어 '평화의 얼굴'이라는 동명의 도서를 출간하였다.
초현실주의 시인인 폴 엘뤼아르는 피카소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공산당 내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주도자였다.
피카소가 1937년 '게르니카'를 그려 나치의 횡포에 예술적으로 저항했을 때, 엘뤼아르 역시 '게르니카의 승리(La victoire de Guernica)'라는 시를 써 예술가의 정치참여(앙가주망)를 실현하였다.
'평화의 얼굴'의 비둘기는 창세기의 비둘기처럼 부리에 올리브 가지를 물고 있고, 펼쳐진 날개 아래, 비둘기의 가슴 부분에 여성의 얼굴이 중첩되어 있다.
피카소의 상징적 표현력이 돋보이는 이 작품의 구도는 프랑코 독재 치하의 스페인이 독수리의 날개 아래에 있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기도 했다.
비둘기에 대한 관심은 곧 평화에 대한 관심이었다. 피카소 덕에 비둘기는 명실상부한 평화의 새가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하는 새라는 사실이 우리 뇌리에 각인되는 데 피카소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영리 전시 담당 큐레이터·미술사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