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갈대밭사이 구성진 아리랑 가락
개화 20년 '멧돼지 목에 하이칼라'…
■청나라
조공국에서 상업 확대지역으로의 '출발점'
'군역상인이 시장개척' 단편적 기록만 남아
■러시아
러~요동반도 연결 '전략적 중개기지' 역할
제물포에 최초 영사관… 패전후 자취 감춰
■일본
인구증가·무역발달 번창기 '작은 일본' 불려
식민지 지배의 실험실로 왜곡된 시각의 자료
130년 전, 한반도 주변 3국이 본 '인천 개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일본은 1883년 인천의 문을 열었다. 일본은 이후 조선을 속국으로 본 청국과 극동지역 패권을 노린 러시아를 차례로 '격파'하고 1905년 조선반도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들의 조선 종주권 쟁탈을 위한 각축장은 인천 제물포였다. 주변 열강 3국이 인천 개항장을 바라보는 시각을 알아보기 위해 학계 여러 인사들에게 연락했지만 '3국이 본 인천 개항' 연구 실적은 미미하다는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인천 개항박물관'을 찾아갔지만 관련 기록이 전시돼 있지 않았다. 기존에 나온 책과 세미나 자료 등에서 일부를 발췌해 청국·러시아·일본이 본 인천을 정리했다.
청국은 상업 확대지, 러시아는 극동정책의 주요 거점지, 일본은 '또 하나의 작은 일본'으로 제물포를 바라봤다. 제물포는 전략적 요충지였지만, 인천사람들을 '하등인', '미개인'으로 본 것은 공통점이다.
우리나라 개항기, 청나라가 개항장 제물포에 대해 남긴 기록은 찾기 힘들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제물포'라는 제목의 책을 낸 이희환 박사도 "당시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건 단편적인 삽화와 기록뿐이었다"고 말했다.
'저물어 가는 왕조'였던 청국이 본 제물포는 '상업'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조선은 '조공국'에서 '시장 개척지'로 부각됐고 그 출발점은 제물포였다.
청국은 1882년 '임오군란 평정'을 이유로 인천 월미도를 거쳐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는데, 당시 상인 40여명이 함께 들어왔다고 한다.
인하대에서 '근대 인천의 화교사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중국 출신 이옥련 박사는 '인천 화교사회의 형성과 전개'라는 책에서 이들 '군역 상인'이 시장 개척자 역할을 했다고 썼다.
이 박사는 이 책에서 "(청국은) 조계지 설정에 있어서 첫 번째 대상지를 인천으로 꼽았다", "청국 정부는 청국 상인의 인천 이주를 적극 권장하는 정책을 내세웠다"고 했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국은 일본에 '조선 주도권'을 빼앗겼지만 상인들은 명맥을 유지했다.
아래 글은 러시아가 1900년에 정책자료집으로 출간한 '한국지(韓國誌)'의 일부분이다. 당시 제물포 풍경이 묘사돼 있다.
매우 불결한 한국인 지구는 서울로 향하는 도로 변의 영국교회가 솟아 있는 언덕의 기슭을 둘러싸고 있다. 언덕의 꼭대기까지 진흙으로 된 오두막들이 뻗어있는데 이 오두막들로 가려면 온몸에 때가 낀 아이들과 할 일 없이 앉아 있거나 어슬렁거리는 한국인 남자들로 가득찬 불결한 골목들을 지나야 한다. (중략)
한국인 지구의 거주민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중의 반인 남자들은 모두 항상 왔다갔다 움직인다. 좁은 거리들은 항상 한복을 입은 사람들로 꽉 차 있는데, 이들은 아무 용무도 없이 많은 상점들에서 몇 시간씩 보내는 것이 분명하다.
러시아에게 '제물포 사람'들은 불결하고, 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존재로 비쳤다.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이재훈 박사에 따르면 19세기 중·후반 러시아가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현상(독립) 유지'에서 '전략적 요충지'로 변한다.
그 중심에 제물포가 있었다. 제물포는 극동 러시아와 중국 랴오둥(요동) 반도를 연결하는 '중개기지'였다. 러시아는 1902년 제물포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동국대 한철호(대외교류연구원장) 교수는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때 서울과 가까운 인천에 거점을 마련해야 했고, 대극동정책의 중요한 지점이라는 인식이 있어 러시아는 제물포에 최초로 영사관을 설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영사관의 수명은 짧았다. 러시아는 1904년 러일전쟁의 첫 교전지인 제물포 앞바다에서 일본에 일격을 당한 뒤 러일전쟁 패전으로 인천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 '멧돼지 목에 하이칼라'(일본)
불과 20년 전 개항되기 전만 해도 그저 갈대만이 우거진 황량한 곳이었다.
월미도 동쪽 끝이나 만석동 바닷가에 누추한 어부의 집에서는 한 줄기 가느다란 연기가 하늘하늘 피어오르고, 숲을 이룬 무성한 갈대밭 속에서 때때로 흘러나오는 아리랑의 구성진 가락을 듣는 것 외에는 사람의 왕래도 배의 출입도 드문 속세 밖의 외딴 세상이었다.
1903년 당시 조선신보사 기자였던 일본인 오가와 유조가 펴낸 '인천번창기'에 나온 '개항 20년 인천 회고담'이다.
인천에서 청나라와 러시아를 차례로 물리치고, 제국주의 팽창을 시작한 일본에게 제물포는 '작은 일본'이었다. 인천번창기는 일본인이 자신들의 '공적'을 기록한 자료다.
왜곡된 시각이 있지만, 당시 일본이 인천 개항을 어떻게 봤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기록이다. '인천번창기'는 개항으로 인해 인천이 인구 증가, 무역 발달, 상업·교육·위생기관 정비, 경제 규모 증대를 이루었다고 강조한다.
이같은 발전이 가능한 것은 일본인의 공이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골자다. 일본에게 제물포는 '식민지 지배의 실험실'이었다. 개항기 제물포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어떤 시선으로 봤는지는 다음 구절에서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정확히 20년 전의 산골 사람은 개화를 맞이하였고, 멧돼지 목에 하이칼라를 달아놓은 듯한 모습이 바로 20년이 흐른 지금(1903년) 인천의 모습이다.
'멧돼지 목에 하이칼라'는 우리 속담 '돼지 목의 진주'와 같은 뜻이다.
2013년 중국, 러시아, 일본에게 인천은 어떤 도시로 비쳐질까? 130년 전과 비교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은 인천이 대한민국의 관문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항 당시의 인천이 제물포를 중심으로 알려졌다면, 현재는 공항과 경제자유구역이 인천을 인식하는 창구다. 한국관광공사 통계를 보면 올해 1~5월 한국에 온 중국인 134만6천명 중 70만7천명은 인천공항으로, 14만9천명은 인천항으로 입국했다.
중국인 10명 중 6~7명은 인천을 통해 한국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기간 일본인 113만8천명 가운데 58만1천명(51%), 러시아인 7만3천명 중 3만7천명(51%)이 인천을 거쳐 한국에 온다.
러시아와 인천은 '정치적'으로, 중국·일본과 인천은 '경제적'으로 얽혀 있다.
러시아는 109년 전 제물포해전을 지금도 기념한다. 주한 러시아대사관은 제물포해전(1904년 2월9일)에서 숨진 장병들을 추모하고 영웅으로 떠받드는 행사를, 1993년 이후 매년 2월 인천 앞바다에서 연다.
당시 해전에서 수장된 러시아 군함 바랴크호 깃발은 일본군의 전리품이 됐다. 해방 후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던 것을, 인천시가 2010년에 '2년 임대' 형식으로 러시아에 보냈고 임대기간을 한 차례 연장했다.
러시아는 바랴크호 깃발을 '러시아의 정신'을 상징하는 표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 대가로 러시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기지 부근 크론슈타트에 '인천광장'을 만들었고, 송영길 인천시장은 러시아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일본계 파친코 자본인 '오카다홀딩스'는 중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복합카지노리조트를 인천 영종도에 조성할 계획이다. 일본 기업의 인천경제자유구역 진출도 눈에 띈다.
세계적 반도체 제조업체인 '도쿄오카공업'(TOK)과 바이오의약품 필수 원료를 만드는 '아지노모도'가 각각 작년 하반기, 올 상반기에 송도국제도시에 생산시설을 착공했다.
글 = 김명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