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이 이전한 이춘원 묘역
현대 풍수가도 감탄한 명당
임진왜란 의병장 이덕남 묘
주산의 맥을 못 받는 형국
순국선열의 묘역 관심 필요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했으나, 인연이 닿아야 명당에 묻히는구나.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이의 충절은 말할 수 없이 높아도, 묻히는 자리는 그에 못하니 안타깝기 그지 없네.
남양주를 지나는 길에 조안면 능내리에 자리한 정약용 선생 묘역을 찾았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잘 알려진 대로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이자, 정치·경제·문학·철학·의학·자연과학 등에 두루 조예가 깊었던 시대가 낳은 인물이다.
정조의 명에 따라 30세의 나이에 수원화성 축조라는 엄청난 대역사를 맡을만큼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75년을 살면서 17년을 유배지에서 보낼 만큼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오랜 유배 생활로 고향에 대한 향수가 남달라서 였을까? 정약용의 묘는 자신의 생가와 나란히 조성돼 있다.
묘역과 생가 등이 잘 정비된 다산 유적지를 들어가 야트막한 언덕위에 조성된 정약용의 묘소를 둘러보았다.
정약용은 세상을 떠나며 자식들에게 "지관한테 묻지 말고 집 뒷동산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고, 유언대로 집 뒷동산에 묻혔다.
언뜻 보면 자신이 태어난 곳에 대한 향수로 평범한 뒷동산에 묻힌 것 같지만, 이곳은 풍수가들이 보기에 보통 명당자리가 아니다.
취재팀이 묘소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풍수를 공부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 여럿이 묘를 둘러보고 감탄을 한다.
각종 학문에 통달했던 정약용이 굳이 그렇게 유언한 이유가 그곳이 명당임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약용의 묘역은 춘천 쪽에서 흘러오는 북한강과 충주에서 달려온 남한강이 합수돼 만나는 곳, 팔당호가 삼면을 둘러싸듯 흐르는 좋은 자리에 있다.
뒤쪽으로는 멀리 예봉산과 갑산, 운길산이 버티고 서서 묘역까지 맥을 흘려보낸다. 좌우로 청룡과 백호가 감싸 안았는데, 위압적으로 높지 않고 눈높이에서 부드럽게 이어져 보기에도 편안함이 느껴진다.
다산 유적지를 나서면서 조광 선생은 아직도 우리나라에 좋은 산소 자리와 집자리가 많이 남아 있는데도, 풍수를 모르거나 무시해서 집안이 망하는 자리에 산소나 집터를 쓰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다산 유적지를 나와 북한강변을 끼고 청평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조광 선생이 잠시 차를 멈추게 한다.
산소를 잘 쓴 사례를 하나 더 보여준다고 하며 찾아간 곳은 이춘원 선생 묘역(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남양주 향토유적 제6호)이다.
큰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신도비가 서 있고, 그 뒤로 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묘는 기념관의 뒤쪽 언덕에 있다.
이춘원(李春元·1571~1634)은 조선 선조때의 문신으로 병조참의와 우승지, 충청도관찰사 등을 지낸 인물이다.
충청도관찰사 시절에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하려 하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고, 굳은 지조와 문장으로 당시 많은 존경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인조반정을 다룬 사극 등에서 자주 등장할 만큼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이춘원의 묘역은 맥이 마치 사람 손으로 쌓아 다져놓은 것처럼 뚜렷하게 흘러나왔다. 주변에는 후손들의 묘가 여럿 자리해 있는데, 가장 좋은 자리에는 역시 선생의 묘가 자리해 있다.
국도변이 빤히 내려다 보이는 자리이고, 앞쪽으로도 이런저런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데도 묘역은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평온하다.
좌우로 청룡과 백호가 뚜렷하고, 앞으로는 북한강이 굽이굽이 흐른다. 강 뒤쪽으로는 뚜렷한 토채들이 여럿 솟아있어, 묘의 주인과 자손들이 중요한 자리에 올랐음을 짐작케 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춘원의 묘는 하남시 감북동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자손들이 잘되면서 인연이 닿아 지금의 자리에 옮겨올 수 있었던 셈이다.
묘 아래 기념관도 최근 몇년 사이에 지어진 것이어서, 자손들이 번성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집작할 수 있었다.
묘역도 정비가 잘되어 보기에도 깔끔했는데, 지금도 이곳저곳 계속해서 정비를 하고 있어 후손들의 정성이 엿보였다.
이처럼 정약용의 묘와 이춘원의 묘는 스스로, 또는 자손들에 의해 명당 자리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취재팀이 둘러본 묘 중에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고도 좋은 자리에 안장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안성에서 찾아간 이덕남 장군 묘(안성시 미양면 구수리, 경기도기념물 제26호)에서 조광 선생은 '볼 것이 없다'며 이내 발길을 돌렸다.
이덕남(李德男 ?~1592)은 임진왜란 당시 안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의병장이다.
그의 공을 높이 사 후에 조정으로부터 충신지문(忠臣之門)을 받고 병조참의에 추증됐지만, 전란의 와중이어서 그랬는지 풍수학에서 볼때 큰 점수를 줄 수 없는 곳에 묘역이 조성됐다.
이덕남의 묘역은 '회룡입수(回龍入首)'형으로 주산(조종산)이 한바퀴 휘돌아 혈을 맺은 형태로 본다.
본래 회룡입수해 혈을 결지하면 발복이 크고 오래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덕남의 묘는 주산의 맥이 힘있게 이어지지 못해 기운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묘 앞에 서 보아도 다른 명당들처럼 안정되고 푸근한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은 한분한분 모두 소중하지요. 하지만 이분들이 모두 좋은 자리에 묻힌 것은 아니에요. 가장 좋은 예로 국립현충원을 보아도 그렇죠.
전직 대통령이나 높은 직에 계셨던 분들은 그중 좋은 자리에 들지만, 그렇지 않은 이름모를 용사들은 골짜기나 맥의 옆구리에 쓴 경우가 수두룩 해요. 자손들이 있는줄 모르겠지만, 잘 될리 없는 곳에 산소를 써야 했으니 가슴이 아플 수밖에요."
이덕남 장군의 묘역을 나서며 조광 선생은 "명당은 인연이 닿아야 만날 수 있다고 하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여 묘를 써주어야 후손들이 잘되어 또다시 나라를 위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아쉬움 가득한 한마디를 던졌다.
/박상일기자
사진/김종택기자
→ 전편에서 이어짐
■ 혈지로 부적합한 땅
혈 주변이 공사 등으로 굴착·토석 채취로 파인곳 피해야
풍수학에서 '혈(穴)'이란 땅의 생기가 흐르는 '맥(脈)' 중에서도 가장 생기가 몰린 곳을 말한다. 좋은 땅의 기운이 모인 곳이므로 묘지터, 집터, 마을터 등으로 쓰면 길한 곳이다.
반면에 땅의 기운이 좋지 않으면 좋은 혈도 나올 수가 없고, 이런 곳에서 억지로 혈이 될만한 곳을 찾아내 묘지터나 집터를 쓰면 불행을 맞게 된다. 다음은 땅의 기운이 나빠 혈지로 적합하지 않은 땅이다.
▲파면한 땅
- 혈 주변이 공사 등으로 인해 굴착됐거나, 토석의 채취로 인해 파이고 부서진 곳. 혈장이 파손되면 생기가 누설돼 흩어지기 때문에 화만 있고 복이 없는 매우 흉한 땅이 된다.
▲흘두한 땅
- 산 자갈이 흙과 섞여 있는 땅으로 사람의 얼굴에 부스럼이 난 것처럼 지저분한 땅. 생기가 흐르지 못하기 때문에 용렬하고 우둔한 자손이 나온다.
▲산만한 땅
- 용(龍·산의 줄기 또는 맥)과 주변 산수가 흩어진 땅. 용맥이 단단하게 뭉쳐 오는 것이 아니라 질서없이 퍼져서 오면 기가 모이지 않아 허약하다. 재물이 달아나 가난해진다.
▲유랭한 땅
- 골짜기가 깊어 음침하고 추운 땅. 용맥과 혈이 결지할 수 없어 생기가 없는 땅이다. 시신이 찬 곳에서 육탈되지 않으면 나쁜 기운만 발산해 자손들이 일찍 큰 화를 당한다.
▲첨세한 땅
- 현지가 뾰족하고 나들어 생기가 머무를 수 없는 땅. 자손들에게 재앙이 끊이지 않는다.
▲탕연한 땅
- 혈지가 너무 낮거나 넓어서 물이 들어올 염려가 있고 비만 오면 질퍽거리는 땅. 흙이 거무튀튀하게 죽은 생기없는 땅으로, 재산이 없어지고 자손이 끊긴다.
▲완경한 땅
- 혈의 입수(入首) 부근이 곧고 딱딱하며 무딘 땅. 보통 왕모래가 많이 있으며, 사람이 오를 때 죽죽 미끄러진다. 모래 사이로 물과 바람이 드나들어, 자손이 온갖 흉화를 당하고 망하게 된다.
※출처 : 다음 카페 '조광의 자연풍수'(http://cafe.daum.net/mirpoong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