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4년께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옛 대불호텔(왼쪽 3층 건물) 사진. 1887년께 대불호텔을 세운 호리 히사타로는 앞서 2~3년 전쯤부터 바로 옆 일본식 2층 목조건물(오른쪽)에서 서양인들을 상대로 숙박업소를 운영해 온 것으로 보인다. 장사가 잘되자 호리는 바로 옆에 서양식 시설과 서비스를 갖춘 대불호텔을 짓고 본격적인 호텔 사업을 시작했다. 1978년 철거된 대불호텔 자리는 공터로 남아있다가, 2011년 옛 호텔의 벽돌구조물이 발견돼 매장문화재로 지정됐다. 인천시 중구청은 사유지인 대불호텔 터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매입을 추진중이다. /이순우 우리문화재연구소장 제공
서양인 숙박시설인 한국 최초 '대불호텔' 경인철도 개통탓 1907년께 문닫아
독일 외교부 역할까지 도맡던 '세창양행' 태극기 광고 한국정부와 갈등
1888년 세워진 자유공원, 근대사 '외교의 현장'… 다국적 성격의 개항도시


인천 개항장 거리에는 아직 개항의 흔적이 서린 건축물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는 인천이 개항도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100여년의 시간동안 사라진 건축물도 많다.

이 중에는 개항 당시 인천을 대표하는 건축물도 있다. 전문가의 조언과 책 등에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몇 개의 건축물을 추리고, 이 건축물을 통해 개항 시기 인천을 그렸다.

'없어진 흔적'을 되짚는 이유는 이들 건축물이 단순한 과거가 아닌 현재 인천을 만든 토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개항장과 함께 태동하고 사라진 것들

개항장은 온통 새로운 것들로 채워졌다. 서양식 시설을 갖추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이 생기고, 근대적 의료서비스가 시작됐다. 외국 기업이 한국시장에 진출하기도 했다.

개항장에는 중국과 일본뿐 아니라 서양 각국의 수많은 외국인들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서양인들을 위한 근대식 숙박시설은 부족했다.

개항 직후 인천에서 무역업과 해운업을 시작한 일본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는 이 점에 착안해 1887년께 일본조계지(현 인천시 중구 중앙동1가 18)에 서양인들을 위한 숙박시설을 지었다. 한국 최초의 호텔인 '대불(大佛)호텔'이 탄생한 배경이다.

당시 인천항으로 입국한 외국인들은 경성(서울)으로 가기 위해 12시간 동안이나 우마차를 타야 했다. 이 때문에 인천에 하루를 머물러야 했다.

개항장에는 외국인을 위한 숙소가 절실했으며, 이 시기가 대불호텔의 '황금기'였다. 해운교통의 발달과 함께 흥한 대불호텔은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인천에서 경성까지의 거리가 1시간으로 단축됐기 때문이다.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외국인들은 곧바로 기차를 타고 경성으로 향했다.

인천발전연구원 김창수 박사는 "개항기 때는 한국이 외세의 일방적인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영국, 독일 등 다양한 국가의 외국인들이 개항장을 드나들었다"고 했다.

이어 "러일전쟁(1905년) 등을 거치며 한국이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며 "이로 인해 서양인의 입출항이 크게 줄어든 점도 대불호텔이 경영난을 겪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 현재 대불호텔 터 사진. /조재현기자
대불호텔은 1907년께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호텔 건물은 중국음식점 등으로 쓰이다가 1978년 철거됐고, 현재는 그 터만 남았다.

그 자리에 상가 건물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붉은 벽돌구조물이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이 터를 2011년 매장문화재로 지정하고 '원형보존' 결정을 내렸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광고를 신문에 실은 것으로 잘 알려진 독일계 무역회사 '세창양행(마이어상사·E. Meyer&Co.)'도 개항장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1884년 독일 본사에서 인천으로 파견된 칼 볼터(C.Wolter) 지사장은 현재 인천시 중구 중앙프라자 상가 자리에 세창양행 사옥을 세웠다.

세창양행은 설립 초기 주로 물물교환을 하는 무역상이었으며 점차 해운사업, 근대기기 도입, 광산 채굴, 무기 판매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사업 영역을 넓히기 위해 한국 정부에 돈을 빌려 주기도 하고 이를 빌미로 외교적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세창양행의 태극기 광고는 당시 한국 정부와 세창양행의 갈등관계를 보여주었다.

세창양행은 다른 외국 상사들과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1897년 4월께부터 독립신문 광고에 태극마크를 사용해 한국인 소비자들에게 접근하고자 했다.

화륜선(증기선)인 '현익호' 광고였는데, 태극기와 M자가 새겨진 세창양행기가 서로 교차된 그림을 썼다.

▲ 존스턴 별장의 역사는 기구하다. 개항 이후 영국인 존스턴이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 그 화려한 외관으로 인해 인천의 랜드마크가 됐다. 이후 일제시대에는 일본인이 매입해 고급 여관이나 요정으로 사용했다. 한국전쟁때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파괴됐다. 현재 이 자리에는 존스턴 별장을 소실시킨 미국과의 수교를 기념하는 상징물이 세워졌다. /인천발전연구원 김창수 연구위원 제공
광고가 게재된 뒤 한국 정부는 사전에 승인받지 않고 국기를 사용한 세창양행에 항의했고, 더 이상 이 광고는 실리지 않았다.

이는 당시 독일 정부를 등에 업고 한국 정부를 압박하던 것에 대한 한국 정부의 항의성 조치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후 개항장에서 일본의 위상이 강해지자 세창양행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세창양행은 1914년 일본의 대독 선전포고 이후, 최소 인력만을 남긴 채 한국에서 철수했다. 사옥 건물은 한국전쟁때 소실됐다.

세창양행 전문가인 조선대 김봉철(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세창양행은 단순한 무역회사가 아니라 독일의 외교부 역할까지 도맡았던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에서 일본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고, 독일의 입김이 줄어들면서 세창양행의 사세도 기울었다"고 했다.

개항장의 외국인이 한국을 수탈의 대상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1890년 10월 10일 미국인 의사 랜디스(E.B Landis)는 인천시 중구 송학동에 집을 얻어 진찰실과 약국을 차렸다.

그 다음날 한국인 환자가 찾아와 랜디스에게 진료를 받았다. 인천에서 '약대인(藥大人·서양의사를 일컫음)'이 진료한 첫 사례다.

▲ 개항장 당시 세창양행 사옥 사진(연도 미상). 1884년 세창양행의 한국 진출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인천시역사자료관 제공
환자 수가 점차 늘어나자 랜디스와 성공회교회는 1891년 현재 인천시 중구 대한성공회 내동교회 자리에 인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성누가병원'을 설립했다.

당시 성누가병원이란 명칭은 서양 선교사들 사이에서만 불렸다. 랜디스는 "성누가병원이란 이름은 조선인에게 의미가 없다"며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선행으로 즐거운 병원'이란 뜻이다.

랜디스는 한국인의 정서를 잘 이해했고, 한국인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당시 사람들이 병원이 위치한 언덕을 '약대이산(약대인산·藥大人山)'이라 불렀을 정도다.

강화도를 비롯해 충청도, 황해도, 전라도 등에서 병원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개원 7년 만인 1898년 랜디스는 32세의 나이에 과로로 사망한다.

랜디스 이후의 성누가병원에는 몇몇 서양의사들이 거쳐 갔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했고 병원은 1916년 폐쇄됐다. 현재 랜디스는 인천시 연수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안장돼 있다.

▲ 대한성공회는 1956년 건물을 복원해 현재의 인천내동교회를 세웠다.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제공
# 외형은 남아있되 사라져 가는 의미

자유공원은 1888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다. 조성 당시와는 이름이 바뀌고 외양에도 변화가 있었지만, 그 틀은 유지한 채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개항기 자유공원에 있던 건축물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소실되면서 자유공원이 가지고 있던 의미마저 사라져 가고 있다.

인천시 중구 관동·항동·북성동·송학동 일대의 응봉산을 자유공원이라 부른다.

시민들의 휴식처로 자리잡은 이 공원은 1888년 조성됐으며, 조성 당시 '각국공원'이라 불렸다. 개항과 함께 서양인들이 인천에 정착했고 이곳 응봉산에 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당시 각국공원은 서양인들이 주로 이용했다. 서양인들이 모여 살던 각국조계(各國租界) 안에 공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에 일본은 각국공원의 이름을 '서공원'으로 바꿨다.

자유공원은 조선 독립운동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1919년 3월 9일 만세 시위가 열렸고, 같은 해 4월 '전국 13도 대표자회의'가 열려 임시정부 수립 추진의 본격화를 알린 장소였다.

해방과 함께 서공원은 '만국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57년에 '자유공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당시 인천시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맥아더 장군 동상을 세우고, 공원 이름을 자유공원으로 바꿨다.

▲ 성누가병원 바깥 마당에 모여있는 사람들(1900년대 초). 옛 성누가병원 건물은 병원 폐쇄 이후 성공회신학원 등으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때 훼손됐다.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제공
존스턴 별장은 영국인 제임스 존스턴의 별장으로 지어졌으며, 인천의 서양식 건물 중에서도 화려한 외양 때문에 인천의 랜드마크로 불릴 정도였다.

1919년까지는 존스턴의 소유였으나, 이후 일본인에게 매각돼 '인천각'으로 이름이 바뀌고 고급 여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의 포격으로 소실됐으며, 그 자리에는 현재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들어서 있다.

한 개인의 별장 건물이 인천의 랜드마크가 되고, 이곳을 포격한 미국과의 수교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그 자리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이런 점들은 개항도시 인천이 가지고 있는 다국적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지금 자유공원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자유공원의 '간략한 연혁'만 설명돼 있을 뿐이다.

김창수 박사는 "만국공원은 한국 근대사의 현장일 뿐 아니라, 동·서양 여러 국가의 동아시아 외교가 이루어진 현장이었다"면서 "지금의 자유공원에서 과거 개항기 만국공원의 모습과 의미는 사라지고 있다.

자유공원은 개항기 인천을 대표하는 곳인 만큼, 이를 기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글 = 정운·박경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