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 당시 이홍장의 청나라 군대 따라온 상인 40명이 원류
1884년 차이나타운에 조계지 설정…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치외법권 보장
'인천은 돈벌이 잘되는곳' 1890년엔 1천명 육박·청일전쟁 패전후 위상 추락
일제의 만주침략위한 '완바오산 사건' 과장보도 전국적 '반화교 테러' 확산

자유공원~홍예문 땅의 모습이 龍연상 '무사항해 기원' 신께 제사
일본인들이 머리-몸통 자르는 도로… 공사 내내 빨간색 물 흘러


'바다에 잇닿아 있는 곳이면 반드시 화교들이 살고 있다'는 말이 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화교들이 많다는 얘기다. 한국의 화교사회는 1883년 인천항 개항과 동시에 인천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인천 화교사회의 역사를 한국의 화교사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인천은 한국 화교사에 있어 출발점이나 다름없다. 인천의 화교들은 언제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펴봤다.

# 화교(華僑)

'화교'란 단어는 어떤 뜻이고,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사전에서는 화교를 '외국에서 사는 중국 사람', '본국을 떠나 해외 각처로 이주하여 현지에 정착, 경제활동을 하면서 본국과 문화적·사회적·법률적·정치적 측면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인 또는 그 자손'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중국인들의 해외 이주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르지만 '화교'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약 110여 년 전인 청나라 말기였다고 한다.

1898년 중국인들이 일본 요코하마에 '화교학교'라는 이름의 학교를 세웠는데, 이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옛날 청과 조선이 교환한 문서에는 청조인(淸朝人)·화인(華人)·청상(淸商) 등으로 표기돼 있었다.

조선에 사는 중국인들에 대한 명칭이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청의 농공상부(農工商部) 대신이 1909년 작성한 문서에 '화교'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한자적 의미를 풀어보면 화(華)는 중국인을 의미하고, 교(僑)는 잠시 거주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1909년 청나라 헌법과 1929년 중화민국 헌법에 의하면 '외국에 거주하면서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모두 화교라고 부른다'고 나와 있다.

▲ 청관 춘절기념행사. /한국인천화교협회 제공
# 화교의 정착과 성장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조선 정부의 참전 요청에 의해 이홍장(李鴻章)의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주둔했다. 이때 함께 따라온 40명의 청나라 상인이 한국에 머무른 첫 화교다.

청의 파병 목적은 단순한 군란 진압이 아니라 군사력을 통한 조선 지배였다. 이후 청은 조선의 비준도 없이 일방적으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고, 1884년 4월 현재의 차이나타운에 청국 조계지를 설정했다.

지금의 인천시 중구 북성동 일대에 청국 조계지가 세워졌고, 청의 조계지가 생긴 후 중국의 건축 방식을 모방한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치외법권, 내지통상권, 연안어업권, 청나라 군함의 연안항해권을 보장했다. 사실상 조선 땅 내에 청나라의 무역 전진기지를 마련한 셈이다.

인천에 청국 조계지가 세워지면서 '인천은 돈벌이가 잘되는 곳'이라는 소문이 청국에 퍼졌다. 이 소문을 들은 산둥성 상인들이 서해를 건너 인천으로 왔다고 한다.

화교의 수는 급증했다. 1883년 48명이던 화교가 1년 후에는 5배에 가까운 235명으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약 1천명에 이르렀다.

이들 대부분은 중국에서 수입한 비단, 광목, 농수산품, 경공업품 등을 팔고 조선의 사금 등을 중국에 보내는 방식으로 장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의 상권을 장악했다. 상가나 집을 지을 필요가 생겨 청나라의 목수, 기와공, 미장공들도 함께 인천에 들어왔다.

▲ 청일 조계 경계와 인천항(좌-일본조계, 우-청국조계). /인천문화재단 제공
# 청일전쟁과 화교

1895년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지면서 조선에 살고 있는 화교들의 위상도 추락했다. 정치적 지위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일본에게 우위를 뺏겼다.

청국에서 조선으로 온 화교들은 패전 국민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된다. 청국 상인들도 청일전쟁 이후 인천을 떠났고 청국 조계지는 급격하게 쇠퇴한다.

이 시기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조선 정부는 조청통상무역조약의 폐기 성명을 발표했고, 청국 조계지는 법적 근거를 상실했다.

그러나 양국 간의 전통적인 우호 관계로 말미암아 전쟁 후에도 조계지로서의 지위는 그나마 유지된다. 청일전쟁 패전 후 청국 조계지는 예전처럼 많은 재화가 유통되는 곳이 아니었다.

무역업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조계지는 쇠락의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무역업에 기대어 살아가던 3차 산업 종사자들 역시 인천을 떠났다.

1920년대에는 일본에 의해 산둥지역의 농부들이 조선으로 이주했는데, 채소농사 기술이 없던 조선에 이주시킨 일종의 '농사 용병'이었다.

더욱이 이 시기 산둥지역의 대홍수는 많은 중국인들의 조선 이주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들이 바로 생계형 농공화교들이다.

현재 인천 차이나타운에 살고 있는 대다수 화교들의 선조 역시 이 시기에 조선으로 이주했다. 농사를 기반으로 생업을 이어갔기 때문에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1880년대 초중반 무역업을 했던 상공화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 장제스 총통과 천청 부총통 취임기념행사. /한국인천화교협회 제공
# 완바오산사건과 인천의 화교 배척

'완바오산사건'은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 완바오산 부근에서 한·중 두 나라 농민 사이에 수로공사 문제로 일어난 일상적 충돌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만주침략을 위한 거짓정보로 인해 '완바오산사건'이 국내에 과장 보도되면서 인천 등 전국으로 반화교 테러가 확산됐다.

급기야 유혈사태로 번졌는데, 한국인들은 화교촌으로 몰려가 음식점, 집, 이발소, 호떡집 등을 습격해 유리창을 깨는 등 소란을 피웠고 각종 기물을 파괴했다.

각종 유언비어 등으로 사건에 대한 소문은 일파만파 커져 갔고, 부평에서는 중국인 2명이 피살되고 한국인이 부상을 입는 사건도 일어났다. 인천지역 경찰이 7월10일께 이미 190명을 검거해 유치장이 만원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은 이 사건을 이용해 한반도의 화교 배척운동을 확산시켰고, 중국으로 귀국한 중국인의 민심까지 뒤흔들어 놓으려 했다.

중국 민심이 만주의 한인들을 공격하길 바란 일본은 한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만주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 동북지역 침략을 기도했다.

완바오산사건은 일본의 동북지역에 대한 침략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완바오산사건의 충격은 화교들에게 아직도 남아있다.

▲ 청관 거리의 모습(1910년대 엽서·지금의 선린동 일대). /신연수씨 제공
# 화교사회에 전해져 내려오는 용머리 민담

현재 인천 차이나타운이 있는 중구 북성동 일대에는 작은 언덕이 있었다.

지금 파라다이스호텔이 있는 곳으로 개항기 인천에 정착한 화교들은 이곳을 '용머리'라고 불렀다. 언덕 지점에서 시작해 자유공원과 홍예문까지 이어지는 땅의 모습이 마치 용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화교들은 용머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용머리 주변은 바다였다. 용머리는 경치가 좋고 바다와 가까워 아이들의 놀이터가 됐다.

중국과 인천을 오가는 배의 선주들은 용머리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무사히 항해를 마치게 해 달라"고 바다의 신에게 빌었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화교들의 성장을 시기한 일본인들이 용머리를 잘라 냈다. 용의 기운이 화교마을로 전해지는 것을 막고자 용의 머리(언덕)와 몸통(자유공원~홍예문) 사이에 도로를 낸 것이다.

도로 공사가 시작돼 인부들이 땅을 파내자 빨간색 물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또 도로가 생긴 뒤 화교마을에선 10여 일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끊임없이 발생했다고 한다.

화교 2세대로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중화요리 음식점을 운영 중인 손덕준(56)씨가 들려준 이야기다.

손씨는 "도로공사 내내 빨간색 물이 계속 흘러나왔다고 들었다"며 "우리 조상들은 빨간색 물을 용의 피로 생각했다"고 전했다. 이어 "인천의 화교들은 다 아는 이야기"라며 "용의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이후 인천 화교의 맥이 끊겼다"고 말했다.

글 = 김성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