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대 중반 인천시 중앙동 4가8에 있는 인천신보사의 건물 전경사진(오른쪽). 대중일보가 1947년부터 쓰던 건물을 인천신보가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사진 왼편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춘득 주필, 송수안 사장, 이종윤 부사장, 윤치봉 총무국장의 사진이 실려있다. 얼굴사진 아래는 당시 식자(植字), 문선(文選) 작업 모습이 나와 있다. 이 사진은 '대한신문연감 1956'에 있는 것을 촬영한 것이다.
근대화된 인력·풍부한 자본
일제 패망후 빠른 창간 가능
인천신문등 지역언론 시초로


해방둥이 대중일보의 창간(1945년 10월7일)과 함께 현대적 개념의 경인언론의 역사가 시작됐다.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이었지만 대중일보 창간 작업은 빠르고 견고했다. 자본금과 인쇄, 보급망 등 신문사의 토대는 여타 지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탄탄했다.

1890년 인천경성격주상보를 시작으로 일본인들이 개항장에서 발행해 온 언론매체를 기반으로 형성된 인프라가 있었고, 이를 활용해 일제가 패망한 뒤 '주체적 언로'를 확보하고자 했던 근대화된 인물들이 당시 경기도 인천에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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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일보 창간 주역 중 사장 고주철(高珠澈)은 외과의사이자 문화사업 후원자로 사회적 평판이 좋은 거부였다.

송수안(宋壽安)은 일제 말 매일신보 인천지국장을 맡은 경력이 있었고, 이종윤(李鍾潤)과 윤세원(尹世遠)은 인쇄소 사장이었다.

기자였던 엄흥섭(嚴興燮), 김도인(金道仁), 진종혁(秦宗赫), 김차영(金次榮) 등은 당대 이름을 날리던 문인이었다.

해방 뒤 전국에 우후죽순 생겨난 언론사 중 대중일보만큼 탄탄한 기반을 갖췄던 곳을 찾기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대중일보는 창간사에서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부면이 일직이 적의 수중에서 왜곡되고 양탈되고 말살되였던 것을 인제야 우리 손으로 낯낯이 탈환해 새로운 토대우에 건설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위대한 임무가 우리의 두 어깨 우에 지여진 것이다", "오직 불편부당의 진정한 언론의 사명을 다할 것을 우리는 만천하 독자에게 공약하는 바이다"고 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로 대중일보는 발행을 중단했지만, 이어 9월에 송수안, 이종윤이 전면에 나서 대중일보를 인천신보로 개제(改題)해 발행한다.

인천신보는 기호일보(1959년 7월)를 거쳐 경기매일신문(1960년 7월)으로 이어진다.

경인 언론의 원뿌리가 대중일보~인천신보~기호일보로 이어지는 흐름에는 송수안이라는 인물이 중심에 서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중일보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송수안의 공이 컸다.

언론사(言論史) 권위자인 이광재(73) 전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언론인으로서 송수안은 재조명받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고 말했다.

1940~50년대 경인지역에는 현재의 이름과 같은 신문이 창간됐다가 곧 사라지고는 했다.

이 밖에 대중일보를 뿌리로 한 신문으로 1946년 3월 창간된 인천신문이란 이름의 신문도 있었다. 대중일보 기자들이 나와 만든 신문으로 '진보적 색채'가 강했고, 기자와 직원들이 필화사건을 겪기도 했다.

당시 인천신문은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폐간된다.

1951년 5월에 창간한 경인일보라는 이름의 신문도 있었는데, 1962년 9월 경기매일신문에 흡수통합된 것으로 한국신문연감(1968년)에 기록돼 있다.

/김명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