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경인 언론은 어땠을까? 자유당 경기도당 기관지가 일간지로 당시 신문연감에 분류돼 있을 정도로 언론계에 정치색이 짙었다.
대한신문연감편집위원회가 펴내고, 대한신문연감사가 1955년 12월에 발행한 자료집 '대한신문연감 1956'에는 중부지방의 일간지로는 인천신보, 경인일보, 경기신문 3개가 소개돼 있다. ┃그래픽 참조
여기서 인천신보는 경인일보의 모태인 대중일보를 잇는 신문이고, 나머지 경인일보와 경기신문은 지금의 경인일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이름의 신문이다.
경인일보가 '뿌리를 찾다' 기획 취재 과정에서 만난 차배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명예교수 소장 '대한신문연감 1956'에는 인천신보의 발행부수는 2만부, 직원수는 52명(남성)이다.
인천신보 측이 쓴 사사에는 "포연탄우속에서 파괴로 인하여 무엇하나 손대일수없는 현실 밑에서 사장 송수안, 부사장 이종윤 양인의 악전고투로 창간"했다고 적었다.
인천시 관동 2가3이 주소인 경인일보는 발행부수 1만2천부, 직원수 35명(여성 5명 포함)이다. 사장은 김병윤(金秉胤)씨로 돼 있고, 사사는 따로 적혀있지 않다.
'인천언론사'에 따르면 이 경인일보는 1955년 2월 9일자로 인천일보에서 제호가 바뀐 신문으로, 1962년 폐간됐다.
경기신문은 수원시 팔달로 3가95에 위치했다. 당시 자유당 경기도당부의 기관지로 "경기도정에 협조하는 300만 도민의 계몽지"로 소개됐다.
대표자는 수원 출신의 민의원 정존수씨로 돼 있다. 발행부수는 1만6천부,직원수는 60명(여성 5명 포함)이었다.
/김명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