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후반 인천항을 통해 수입된 시멘트를 옮기는 모습. 선박과 육지가 좁은 너비의 널빤지로 이어져 있다. /인천항운노동조합 제공
특성상 가장 먼저 인력공급 단체 생겼지만 착취 심해
1926~1936년까지 수차례 민족적 차별에 대항하기도

항만 노동자 주축 '인천자유노조' 분열과 갈등 겪어
1960년대 이후 컨테이너 등장 하역작업 기계화 속도
2007년 항운노조 상용화로 차질없는 인력 운용 가능


1883년 인천항 개항은 경제체제의 변화를 가져왔다. 항구가 열렸고, 열린 항구로는 외국에서 사람과 물품이 들어왔다.

이 물품은 조선 각지로 퍼져 나갔고, 이로 인해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는 자본주의사회로 급격히 바뀌었다.

경제체제 변화는 노동자의 모습을 바꿨다. 사업자로부터 '임금'을 받는 노동 체계가 탄생한 것이다.

농경사회는 '신분' '사회적 서열' '제도상 등급'을 중요하게 여겼다. 임금노동자가 가장 먼저 생겨난 곳이 항만이다.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 항만에서 일한 사람들의 역사를 훑었다. 책과 자료 등을 통해 항만 노동자의 과거를 살폈다.

현직에 있는 항만 노동자와 과거 항만에서 일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 1930년대 인천항에서 항만 노동자들이 배에 실을 미곡을 지게에 싣고 걷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동조합 제공
# 항만 노동의 특성

항만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임금노동자가 생긴 곳이다. 항만 노동자들은 가장 먼저 노동자 조직을 만들었다. 이는 항만 노동의 특성에 기인한다.

항만으로 들어오거나 이곳에서 나가는 배가 있어야 부두에 일이 생긴다.

배의 입출항은 계절과 날씨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규칙적으로 이뤄지지 않았고, 이 때문에 하역회사는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는 항만에 인력을 공급하는 단체가 생기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인천항 개항 초기에는 항만 인력을 공급하는 '창신조'라는 단체가 있었다. 이 단체는 항만 인력을 공급하는 기업 형태로 운영됐다.

때문에 노동자들의 복지나 처우 개선 등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기에 급급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항만 노동자 수가 많아졌고, 자연스럽게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이후 노동조합에서 항만 인력을 공급하게 됐다.

그러나 항만 노동자들은 하역회사에서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닌 처리한 물량의 종류와 양에 따라 임금을 받았다. 이러한 인천 항만 노동의 특성은 2007년 항운노조 상용화가 이뤄지기 전까지 이어졌다.

▲ 1960년대 초 인천항 모습. 미곡 등이 곳곳에 쌓여 있고, 인근에서는 항만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인천항운노동조합 제공
# 일제시대 항만 노동자

"어느날 중량물인 선로레일의 작업노임을 계산해보니 그날 취업한 반원 16명에게 1인당 12원이 삯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4전밖에 주지 않아 부십장인 이삼봉이란 자에 항의했으나 아랑곳하지 않아, 울분이 나서 구타하다 3일간 구류처분을 받았다".

'항운노동조합 111년사'에 기록된 고(故) 이주원씨 이야기다. 그는 1937년부터 인천항에서 하역 작업을 했다. 당시 인천에는 '창신조'라는 항만 인력 공급 단체가 있었는데, 횡포가 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창신조는 정해진 임금률로 돈을 주지 않고, 자신들이 임의로 수당을 정했다. 임금률도 일본인과 한국인 등에 따라 차등을 두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해방 후에는 창신조의 일원 중 노동자에게 맞아 죽은 자가 많았으며, 언급된 이삼봉이란 사람도 노동자의 보복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항운노동조합사는 전하고 있다.

일제시대 때 항만 노동자들은 열악한 처우 속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파업이 이어졌다. 1926년, 1928년, 1933년, 1935년, 1936년에 각각 인천 항만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각각 1천여명이 참여했으며, 이들은 임금 인상 또는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당시 항만 노동자들은 일본인들의 민족적 차별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일제의 전시(戰時)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 1970년대 후반 화수부두에서 항만 노동자 여럿이 목재를 옮기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동조합 제공
# 노동조직의 탄생과 변천

인천자유노동조합은 대한노총 산하 조직 중 가장 먼저 결성됐다. 자유노동조합은 항만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인천지역 노동자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이었다.

자유노동조합은 항만에 인력을 공급하는 일도 맡아 그 지위를 굳건히 했다. 그 전에는 하역회사가 십장(일꾼을 감독·지시하는 우두머리)과 결탁해 노동력을 동원했다.

자유노동조합은 부두를 7개 지역으로 나누는 등 조직을 정비·확장했다. 그러나 노조는 1947년에 항만연맹과 부두연맹으로 분리되는 등 분열과 갈등을 겪었다.

'도끼싸움'은 인천항 노동자들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1953년 3월 13일 발생한 '도끼싸움'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생겨난 신세력과 구세력 간의 갈등이 계기가 됐다. 신파 지지세력이 도끼 등을 들고 조합 사무실에 난입해 구파 간부들을 폭행한 사건이다.

이러한 갈등 끝에 1956년 인천부두노동조합이 조직됐다. 작업 권역별로 나뉘어 있던 조직을 통일해 작업권으로 인한 분규를 없애려는 움직임이었다.

인천부두노동조합은 이후 새로 생겨난 인천부두자유노동조합과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1958년 두 노조는 통합을 이루고 단일한 조직으로 태어났다.

1961년 '근로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 시행 등으로 노동조합 활동이 보장되자, 전국의 노동자들이 전국 단위 조직을 결성했다.

이 시기에 전국부두노동조합이 조직됐으며, 인천에 있던 노조는 전국부두노조 인천지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후 1980년에는 분리돼 있던 항만노조와 운수노조가 통합되면서 전국항운노동조합 인천지부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전국항운노조 인천지부는 인천항운노동조합(1981년), 경인항운노동조합(1998년) 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며, 2004년부터는 인천항운노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 1970년대 중반 연안부두에서 널빤지를 이용해 화물을 옮기는 모습. /인천항운노동조합 제공
# 항만 노동자들은 어떻게 일했나?

개항 이후 인천항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장됐고,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 수도 많아졌다. 이와 함께 진행된 것이 기계의 도입이다.

개항 직후, 항만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만을 이용해 일해야 했다. 지게 등의 간단한 도구만을 이용해 배에 있는 물자를 육지로 내려야 했다.

1960년대부터 하역 과정에 본격적으로 기계가 도입됐으며, 컨테이너가 등장하면서 하역 작업의 기계화가 빨라졌다. 하지만 벌크화물 하역 작업의 경우, 1980년대까지도 노동자의 힘에 의존해야 했다.

1980년대부터 인천의 하역회사에서 일한 박희국(69)씨는 "3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도 기계화가 많이 이뤄졌다. 기계 도입 전에는 안전사고도 많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사망 사고 또한 많았다는 것이 퇴직한 이들의 이야기다. 1980년대 인천항에서 일한 고상훈(61)씨는 "철재작업은 외항에서 이뤄졌다.

허리에 베어링이라는 장비를 착용했는데, 실수로 바다에 빠지면 그 장비 때문에 나올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익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점차 벌크화물의 컨테이너화가 이뤄지면서 하역 작업에서 기계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로 인해 안전사고가 줄었으며, 항만 노동자의 노동 강도도 감소했다.

▲ 지난 5일 인천항 내항 2부두. 인천항운노조원이 배에서 화물을 내리고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지게 등을 이용해 하역 작업이 이뤄졌지만, 점차 기계화가 이뤄져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됐다. /임순석기자
# 항운노조 상용화

항만 노동자들은 하역회사에 소속돼 있지 않고 항운노조 또는 중간 관리기관에 속해 있었다. 항운노조가 하역회사에 인력을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항만 물동량이 일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시스템이었다.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이 시스템이 2000년대 들어 바뀌게 된다.

2002년 발표된 '항만노무공급체계 개편방안연구'를 계기로 정부는 부산, 인천, 평택 등 기계화가 진전된 항만을 대상으로 상용화를 추진했다.

인천, 부산 등지에서는 이와 관련된 토론회가 연이어 개최됐고, 정부는 항운노조 상용화를 위한 절차를 밟았다.

2005년 12월 항운노조 상용화와 이에 따른 지원책을 뼈대로 한 '항만인력공급체계의 개편을 위한 지원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후 9개월간 진행된 100여차례의 협의 끝에 2007년 7월 노·사·정 합의가 이뤄졌으며, 그해 10월 인천항의 상용화 체제가 전면 시행됐다.

이 과정에서 항운노조원 800여명의 희망퇴직이 이뤄졌으며, 인력 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인력풀이 구성됐다.

상용화 이후 발행된 '항만인력공급체계 개편백서'는 상용화의 의미로 ▲노사정 상생 ▲인력비 감축 등 경제적 효과 ▲항운노조원 안정적 고용 등을 꼽았다.

글 = 정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