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만명 인구의 44% 기구 직원·가족·외교관
통일이후 행정이전으로 위기 맞았던 독일 본
특별법 만들어 UN 사무국들로 빈 공간 채워
벨기에 브뤼셀 1970년대 무역·중화학공업 쇠퇴
발전전략 변경 현재 컨벤션·서비스업 경제 주도
정치·문화 주요 어젠다 선점 '국제 사회 중심부'
글로벌 기업·로펌도 몰려 경제적 파급효과 상당
파격적 인센티브 등 다각도 기구 유치 전략 필요
지난 7월 31일 스위스 제네바 공항. 이곳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달리자 제네바 중심가인 팔라데나시옹(Place des Nations)역이 나왔다.
역 바로 앞에는 제네바에서 가장 큰 국제기구인 유엔 유럽본부가 위치해 있다.
팔라데나시옹역을 중심으로 걸어서 20~30분 거리에 세계 무역기구(WTO), 국제 노동기구(ILO), 세계 보건기구(WHO) 등 우리가 신문 국제면이나 TV 뉴스에서 자주 보던 주요 국제 기구 20여개가 밀집해 있다.
제네바 인구가 19만명인데 이중 44%가 이런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직원과 그들의 가족, 외교관 등 외국인이라고 하니 전 세계가 왜 제네바를 국제도시라고 부르는지 짐작할만 했다.
유럽에는 스위스 제네바 외에도 독일 본, 벨기에 브뤼셀 등 전 세계 정치·경제·문화 어젠다를 선점하고 주도해 나가는 도시들이 여럿 있다. 이들 도시들은 국제 사회의 중심부로서 역할을 하고, 국제기구를 도시 성장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
지난해 유엔 녹색기후기금(GCF) 본부를 유치한 인천 송도국제도시는 이런 유럽의 국제도시들을 모델로 삼아, 도시 성장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경인일보는 지난 7월 28일부터 5박6일간 독일 본, 벨기에 브뤼셀, 스위스 제네바 등 유럽의 주요 국제도시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국제기구 유치 전략과 이를 활용한 도시 발전 과정 등을 알아봤다.
통일 전 서독의 수도였던 독일 본은 세계 경제의 중심을 자처할만큼 잘 나가는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90년 동독과 서독이 통일된 후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수도가 동독의 베를린으로 정해진 후 본에 밀집해 있던 주요 행정기구 3분의 2 가량이 모두 베를린으로 이전한 것이다.
당장 도시 기반이 흔들릴 처지에 놓이게 됐지만, 독일 연방 정부는 행정기구가 떠난 자리를 대신할 각종 국제기구를 유치하기 시작했다.
독일 연방 정부는 1994년 본으로 이전하는 국제기구에 사무실 무상 임대나 거주 직원의 특권 조항 등을 담은 특별법을 만들어 적극적인 국제기구 유치 전략을 펼쳤다.
유엔 캠퍼스라고 이름 붙여진 구 연방의회 건물에는 현재 유엔 기후변화협약사무국을 비롯 사막화방지 협약 사무국, 유엔 자원봉사자 사무국 등 20여개 유엔기구 1천여명의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다.
스테판 바그너 본시 국제기구 유치 국장은 "통일 전이나 후나 본의 경제 규모는 변함이 없다"며 "이미 통일 직전부터 정부가 나서 도심 공동화 현상을 막기 위한 국제기구 유치 전략 등을 세웠기 때문에, 통일 전보다 국제도시로 더욱 명성을 날리게 됐다"고 말했다.
벨기에 브뤼셀의 경우, 1970년대부터 국제기구 유치 전략에 집중했다. 1970년대 이전 브뤼셀은 무역과 중화학 공업을 주로 해 도시 성장을 이끌어 갔지만 이후 이 분야 산업이 쇠퇴기를 맞으면서 도시 발전 전략을 국제기구 유치에 맞춰 오고 있다.
브뤼셀 전체 인구가 100만명쯤 되는데 이 중 유럽연합(EU)과 유럽의회 등 각종 국제기구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수와 그 가족 수만 2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브뤼셀 경제의 절반 이상을 국제기구를 통한 컨벤션 사업이나 서비스 산업 등이 담당하고 있다.
독일 본이나 벨기에 브뤼셀의 경우 처음부터 국제도시로서 성장한 게 아니고, 도시의 생존 전략으로 국제기구 유치를 통한 도시 발전을 꾀한 것이다.
벨기에 브뤼셀은 유럽의 수도라고 불린다. 유럽연합(EU)본부와 유럽의회가 모두 이 도시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유럽 대륙을 이끄는 EU 본부가 있다보니, 도요타 같은 글로벌 기업의 유럽 본부가 브뤼셀에 몰려 있고 기업 간 소송을 전문적으로 하는 수많은 대형 로펌, 로비스트들도 이 도시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브뤼셀에는 EU를 상대로 한 로비단체가 3천여개나 되고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비스트만 해도 2만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 컨퍼런스 또한 한 해 7만여건이나 열려 세계에서 국제회의 개최 건수 3위를 기록하고 있다.
국제컨퍼런스로 인한 한 해 매출이 40억유로, 이로 인한 고용 창출이 2만2천명이라고 하니, 국제기구 유치가 도시를 먹여 살리는 하나의 산업이 된 것이다.
독일 본이나 스위스 제네바 또한 국제기구 유치로 인한 부가적인 경제 이익이 브뤼셀 못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네바의 경우 한 해 평균 2천여 건의 국제회의가 개최되고 있으며 독일 본도 이와 비슷한 수준이다.
브뤼셀 자유대학(VUB)에서 도시 문화를 가르치고 있는 에릭 코리언 교수는 "국제기구 유치도 하나의 산업으로 볼 수 있다"며 "인천 송도가 국제도시로 도약하기 위해선 유럽 여러 나라 못지 않은 파격적인 인센티브 등 다각적인 유치 전략이 필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무역협회 브뤼셀지부 관계자도 "주요 국제기구 하나만 도시에 있어도 그곳에서 파급되는 경제 효과는, 자동차 몇 대 더 파는 수준을 뛰어넘는다"며 "인구 100만의 브뤼셀이 세계 주요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발판도 바로 국제기구 덕분"이라고 했다.
제네바/김명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