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주거공간 무상임대… 시민엔 무료개방
입주 조건은 작업실 공개 '친절한 소통' 원칙
퍼포먼스·작품 전시등 문화공간으로 재탄생
공유경제는 내 것을 타인과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1차적 개념에서 출발해, 물질뿐 아니라 가치와 경험, 지혜를 나누는 것으로 확장됐다.
확장의 기세는 경제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예술, 정책 등의 분야로 확산됐다. '공유'라는 단어 또한 본래의 의미를 넘어 공간을 재생하고 지혜를 발전시키며 사회를 성숙시키는 사회적 요소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됐다.
많은 국가들이 이러한 공유의 가치를 인정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이를 인큐베이팅하고 있다. 특히 예술분야에서 이런 움직임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공유의 효력이 가장 폭넓게 사회에 가 닿기 때문일 것이다.
파리 시민과 관광객으로 늘 북적이는 중심가에 작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건물이 있다.
취재진이 방문한 8월초에는 일회용 비닐장갑에 빵빵하게 신문지를 채워넣고 색색깔 물감으로 칠한 수많은 손들이 만국기처럼 건물 외벽에 장식돼 있었다.
7층 건물에 장식된 손들은 방문객을 부르며 손짓하는 것 같았다. 파리 리볼리가의 로베르네 집(chez Robert)이다.
'로베르'는 프랑스에서 아주 흔하게 쓰이는 이름이지만, '로베르네 집'은 '점거 아틀리에'라는 독특한 별칭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 정부와 크래딧 은행(LCL)의 공동 소유였던 리볼리가 59번지 건물은 은행이 파산하면서 정부기관의 부동산회사(CDR)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러나 이 건물은 CDR가 관리책임을 맡은 수십채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방치됐다.
14년동안 방치돼 있던 59번지 건물에 1999년 12월 3명의 젊은 예술가들이 숨어들었다. 현재 로베르네 집의 대표인 가스파르 플라노에(Gaspard)와 칼렉스(Kalex), 브르노(Bruno)였다.
수요일 점거를 시작한 이들은 4일째 되던 토요일부터 시민들에게 공간을 개방했다. 점거는 했지만 이 건물을 소유하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무
상으로 점거하고 있으니 모두와 무상으로 공유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들은 공간을 개방했다. 그러나 엄연한 불법이었다. 점거 이후 프랑스 정부로부터 고발당했고, 소동도 제기됐다.
다행히 버려져 방치된 건물을 무단 점거했더라도 겨울에는 쫓아낼 수 없는 프랑스법에 따라 이들은 점거생활을 영위(?)하며 한편으로는 기나긴 법정 싸움을 이어갔다.
이들을 지지한 변호사들의 도움과 언론의 우호적 보도, 그리고 일부 정치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6개월마다 법원을 통해 한시적인 소유권을 연장할 수 있게 됐다.
2009년에 합법적인 입주 근거가 마련돼 현재는 3년마다 파리시와 입주기간을 갱신하며 무상 임대하고 있다. 점거 이틀째 로베르네 집에 입주한 파스칼 포카르는 "점거 당시 유리창은 대부분 깨어진 상태였고 가장 위층에는 비둘기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예술가들에게 점거당한 폐허는 각종 퍼포먼스와 전시가 연일 이뤄지는 문화공간으로 바뀌기까지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99년 겨울, 이 건물에 세 들어 있던 가게의 이름을 그대로 재사용해 '로베르네 집'이 된 리볼리 59번지 건물에는 이듬해부터 방문객의 발길이 늘었다.
2001년 각종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명소로 부각됐고, 2002년에는 프랑스 문화부 조사결과, 한해 4만명이 로베르네 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해 파리시의 동의하에 법인으로 등록하고 '59리볼리협회'를 설립했다.
현재는 7층 건물에 32개의 작업실과 2개의 공동 전시실, 숙소가 갖춰져있다. 월요일과 크리스마스, 1월1일 등 공휴일을 제외하고 1년 내내 전시 및 작업 공간을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개방한다.
들어선 사람들은 낯선 작업공간과 다양한 작품에 시간과 마음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건물 내부에 들어서면 곳곳에서 무심한 듯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작가들을 만나게 된다.
1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 20여개 국가의 작가들이 상주하며 회화, 사진,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들은 1년에 한두차례 단체전을 열고, 시시때때로 개인전을 진행한다. 3~4개월에 한 번씩 건물 전면 디자인을 변경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공개하는 날은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지난 5월에는 건물의 각 유리창마다 오케스트라 단원을 배치, 거리를 향해 연주를 했다.
바캉스 기간인 8월을 제외하고 주말마다 음악콘서트를 열기도 하고, 매년 여름 독일 쾰른, 스위스 제네바의 갤러리들과 연계해 '점거 아틀리에 순회전' 등을 개최하는 등 1년 내내 쉴 새 없이 무언가가 벌어진다.
파리시는 공간을 무상으로 임대하고 예술가들은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십시일반으로 건물 운영비를 보태 로베르네 집을 꾸려나가고 있다.
한 달에 130유로(약 20만원)의 공간 사용료를 내고 1주일에 1번 작가들이 돌아가며 1층 안내데스크에서 방문객을 안내한다.
방문객을 안내하는 날이 아니더라도 작가들은 매일같이 작업현장에서 방문객을 만나며 소통한다. 관객이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즉각적인 반응을 살필 수도 있다. 즉석 판매도 이뤄진다.
2009년 입주한 세바스티안 로카(Sebastien Lecca·41)는 "친구들의 초청으로 잠깐 거주할 생각으로 들어왔는데, 이 곳에 매료돼 5년째 머물고 있다"며 "파리 중심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고, 또한 주위 작가들과의 교류 및 협업이 가능하고, 지역주민(관람객)과도 소통할 수 있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정부나 예술단체에서 운영하는 입주작가 프로그램과 다른 점이라면, 입주조건이 까다롭지 않다는 것이다.
수상경력이나 전시경력은 필요없다. 자신의 작업실을 시민들에게 공개할 수 있으면 된다. 방문객에게 친절하고, 단체생활이 가능하면 된다. 개방과 소통이라는 원칙을 지키며 자유와 예술을 영위한다.
마굿간과 창고 등이 있던 넓은 공간과 함께 건물 전체가 수십년동안 방치됐다. 2008년 시에서 시설을 개보수해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연극, 춤, 음악, 시각아트, 마술, 현대서커스까지 이 곳에서 공연되고 있으며, 2010년부터 연간 3천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해 3년동안 150만 관객을 끌어모았다.
파리에는 수많은 박물관을 포함한 문화예술기관이 있지만 대부분 예술적인 부분을 강조하는데 비해 이곳은 사회적 부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상카르트가 위치한 19구는 20세 미만 인구가 전체 주민 수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3분의1은 실업자이며, 청소년 보호소가 가장 많은 곳이다.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시장은 북19구에 대대적인 문화적 투자를 추진했고, 2010년 부임한 상카르트의 디렉터 조세 마누엘 곤잘레스(Jose-Manuel Goncalves)는 이곳을 생동감있는,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디즈니랜드의 공간을 관리하던 그는 서커스 마술, 연극을 도입했고 모든 공간을 쉼 없이 활용하는 한편 경비인력을 관람객의 눈에 띄지 않게 했다.
상카르트 관계자는 "문화예술복합공간을 이렇게 완전히 공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서 지역주민들이 매우 좋아하고 지역사회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도 일조했다"며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앙케이트를 실시하고, 파트너십 기관의 후기, 미디어 언론의 평가를 통해 지속적으로 그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 = 민정주기자
위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