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방산에서 바라본 포천 시가지 전경. 시가지 건물 뒤로 반월산이 영상사(領相砂)를 이루며 서 있고, 멀리 뒤쪽으로는 천주산과 수원산의 맥이 힘차게 이어지며 시가지 동쪽을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다./김종택기자
힘있는 산맥 둘러 감싸고 포천천 흘러 명당
이항복·양사언·최익현 등 인물 많이 배출
인평대균 묘역 풍수 고려했지만 맥이 부족
현대사 중요인물 오치성 묘 후대 번성할 터


수려한 산은 기운이 넘치고 맑은 물이 땅을 적시며 흐르니, 복을 받은 땅에서 훌륭한 인물이 어찌 태어나지 않으랴.

포천은 풍수지리학자들이 '좋은 기운이 넘치는 땅'으로 손꼽는 곳이다. 한북정맥의 천보산에서 갈라져 나온 왕방산 줄기가 포천 시가지를 서쪽에서 감싸고, 동쪽으로는 천주산과 수원산의 맥이 이어지며 시가지를 에워싼다.

그 사이로는 포천천이 유유히 대지를 적시며 한탄강으로 흘러든다.

북쪽으로는 명성산과 광덕산 줄기가 굳건하게 서서 힘있게 맥을 뻗어 내리고, 남쪽으로는 죽엽산 자락이 안산을 이루며 아늑하게 감싸니, 포천은 전체적으로 명당의 조건을 갖춘 좋은 땅으로 손색이 없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포천에서는 예로부터 유난히 인물이 많이 배출됐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李恒福, 1556~1618)과 이덕형(李德馨, 1561~1613), '태산이 높다 하되…'라는 시조로 유명한 당대의 대학자 양사언(楊士彦, 1517~1584), 화서학파의 거두이자 실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김평묵(金平默, 1819~1891), 조선초 대학자이자 정국공신으로 유명한 유순(柳洵, 1441~1517), 위정척사의 의병장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임금으로부터 효우의 정려를 받은 이름난 효자 유인선(柳仁善, 1542~?) 등 수많은 학자와 정치가, 충신은 물론 독립운동가와 효자들이 포천에서 배출됐다. '좋은 땅에서 훌륭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풍수의 기본을 증명하는 땅인 셈이다.

포천 둘러보기는 포천의 주산(主山)으로 꼽히는 왕방산에서 시작됐다. 높이 737m의 왕방산은 북동쪽 깊이울 계곡에서 남서쪽으로 양주 회암사지까지 맥을 길게 이으며 포천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왕방산의 왕방사는 872년(신라 헌강왕 3)에 도선국사가 정업을 닦을때 왕이 친히 행차해 격려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조선 태조가 이 산에 있는 사찰(현 보덕사 터)에 들러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 조선 태종이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를 모시고 재백골(포천시 소흘읍 이동교리)에서 살 때 늘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어, 오래전부터 국왕들과 인연을 맺은 명산이다.

"왕방산은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맥이 크게 출렁이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져 묵직하면서도 온화한 기운이 넘치는 좋은 산이에요. 그래서인지 옛부터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지금도 절과 기도원 등이 여럿 자리를 잡고 있지요. 산 위에 올라 포천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왕방산의 좋은 기운을 더 잘 느낄 수 있어요."

조광 선생의 설명처럼 왕방산을 오르는 길에는 곳곳에 절과 기도원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주중임에도 많은 등산객들이 등산로를 따라 왕방산을 오르며 산이 전해주는 좋은 기운을 마음껏 즐기는 모습이었다. 등산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자 동쪽으로 시야가 넓게 트인 곳이 나와 포천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포천은 시가지가 넓지는 않지만 좋은 산들이 사방을 두르고 있는데다가, 시가지 가운데에 반월산이 영상사(領相砂)를 이루며 기운을 모아주고 있어요. 풍수적으로 참 좋은 곳이지요. 그래서 앞으로 많은 발전이 기대되는 곳이라 할 수 있어요."

왕방산을 내려오다 보니, 왕방산의 남쪽으로 맥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며 감싸안은 곳에 대진대학교가 자리해 있다. 왕방산의 좋은 기운을 받아서일까? 대진대학교는 지난 1992년 첫 입학생을 받은 이후로 20년만에 경기북부의 대표적 대학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왕방산을 나선 취재팀은 북쪽으로 발길을 돌려 신북면 신평리에 자리한 인평대군 묘를 찾았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인조의 셋째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으로 병자호란 뒤 국난 극복에 헌신하다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정통해 당대의 대학자들과 교류했으며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던 인물이다.
▲인평대군 묘역
인평대군의 묘는 신평리 마을 변두리의 높지 않은 산을 뒤로 하고 신평리 마을을 바라보며 조용히 자리해 있다.

여느 왕족의 묘와 크게 다르지 않게 적당한 규모로 조성돼 있으며, 뒤로 주산을 두고 청룡과 백호가 감싸 안은 풍수의 기본을 잘 지킨 곳에 묘를 썼다. 하지만 너무 젊어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까? 주산의 맥도 부족한 듯 하고 앞쪽으로 좋은 안산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훌륭한 인물의 묘가 꼭 훌륭한 곳에 자리하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묘를 잘 쓰면 후손들이 복을 받을 뿐 아니라, 묘의 주인도 후세에 명성을 얻게 돼요. 이번에는 이곳과 좀 다른 묘를 찾아가 보는게 좋겠네요."
▲오치성 묘역
취재팀은 조광 선생의 안내로 인근 신북면 삼성당리로 향했다. 이곳에는 6~8대와 10대까지 국회의원을 네차례나 지내고, 1970년대에 내무부장관까지 지냈던 오치성의 묘가 있다. 오치성은 황해도 출신으로 5·16군사정변에 핵심으로 참여했으며, 박정희 정부의 요직을 맡아온 한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자. 이곳의 묘는 지금까지 봐왔던 묘들과 좀 분위기가 다를 겁니다. 음택이 자손에게도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곳이지요."

조광 선생의 설명처럼 오치성의 묘역은 넓고 깨끗하게 단장돼 후손들이 번성해 있음을 실감케 했다. 묘역 입구에는 송덕비와 불망비가 줄지어 서있고, 묘역을 오르는 길을 비롯한 묘역 주변에는 일부러 옮겨 심은 좋은 나무들이 빼곡하다.

묘 주변에는 문인석과 석등 뿐 아니라, 묘를 찾아온 가족들을 위해 돌로 만든 벤치까지 곳곳에 마련돼 있다. 후손들이 잘 되어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묘역을 정성껏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 묘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른쪽으로 감아돈 백호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맥도 잘 탔고, 청룡도 왼쪽으로 잘 뻗어 있지만, 백호가 두텁게 뻗으며 혈은 안듯이 감아 돌아왔어요. 게다가 백호의 끝이 미약해지지 않고 작은 봉우리를 맺으며 감싸들어 왔으니, 자손들에게 부귀가 들어올 수밖에 없겠지요."
▲오치성 묘역 아래 연못
묘역 아래를 살펴보니 사각형의 연못이 자리해 있다. 논밭이 있어 물이 있는 곳에 일부러 공을 들여 사각형의 연못을 만든 것으로 보였다.

혈 앞에 놓인 이같은 연못을 지당수(地塘水)라고 하는데, 지당수가 깨끗하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면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한다. 바로 옆 백호에 해당하는 낮은 언덕의 끝에는 약수터가 정갈하게 만들어져 있어, 이곳이 맑은 물이 솟는 명당임을 알 수 있게 했다.

"포천은 기운이 좋은 땅입니다. 하지만 기운이 좋다고 아무데나 음택·양택을 해서는 안되고, 풍수의 가르침에 따라 좋은 자리를 골라 묘와 집터를 써야 후손에게 좋은 기운이 전해지게 되는 것이지요. 후손이 잘 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묘역을 보면 알 수 있고, 또 그로부터 풍수의 중요함을 확인할 수 있으니, 오늘은 좋은 공부를 한 셈입니다."

/박상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