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 13편 그림 토대
美현대사 변곡점 女배우 삶에 녹여
정밀한 미술·훌륭한 연기 불구
힘 없는 이야기 아트영화 못벗어나
감독 : 구스타브 도이치
출연 : 스테파니 커밍, 크리스토프 배치
개봉일 : 12월 26일. 15세이상 관람가
그림을 보다 보면 어떤 그림들은 오랜 시간 마음에 남는 경우가 있다. 노동에 지친 여인이 먼 산을 바라보는 뒷모습을 그린 로트렉의 '세탁부'나 유다의 배신을 암시하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같은 그림들이 그러하다. 미술평론가 곰브리치가 말한 것처럼 어떤 그림에는 '드라마와 흥분'이 존재한다.
'셜리에 관한 모든 것'(원제 Shirley: vision of reality)은 그림 속에 잠자는 꿈틀대는 드라마를 영상으로 끄집어낸 독특한 작품이다. 현대 미국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가 그린 13편의 그림을 토대로 했다.
구스타프 도이치 감독은 서로 다른 그림 속 주인공을 '셜리'라고 명명하고, 필름 속에서 노닐도록 생명을 불어넣었다. 감독은 가공의 인물 셜리를 통해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격변하는 미국의 사회상을 담아냈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셜리(스테파니 커밍)는 라디오를 즐겨 들으며 영화와 연극 보는 것을 좋아하는 배우다. 남편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는 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매카시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영화계는 잦은 고발로 인한 혼란이 발생하고, 셜리는 정신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영화는 세월과 함께 늙어가는 배우 셜리를 보여주는데 치중한다. 주식시장의 붕괴,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매카시즘 광풍, 마틴 루터 킹의 죽음 등 미국 현대사의 변곡점들이 셜리라는 인물 속에 녹아있다.
90여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30년의 세월을 담았으나 이야기의 진행은 상당히 더디다. 마치 낮잠에서 막 깬 판다처럼 느린 카메라는 천천히, 하지만 깊이 있게 셜리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사랑하는 사람과 맞이한 찬란한 아침, 밀고가 횡행하는 시대의 배덕, 민감한 예술가들에게 종종 찾아오는 불면의 고통 등 사랑의 아름다움과 불안을 머금은 시대의 공기가 영화를 휘감는다.
"다 녹기 전에 생의 아이스크림을 즐기라"는 에피쿠로스적인 세계관이나 플라톤의 '이데아론' 같은 사변적인 철학도 셜리의 내레이션을 통해 관객에게 다가간다. 다분히 이론적인 설명이 아니라 삶 속에 묻어 있는 철학이 영화 속에서 생동한다.
영화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우아하고 미술은 정밀하다. 마치 현대 극사실주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원색의 향연이 돋보인다. 주인공 스테파니 커밍과 그녀의 남편 역을 맡은 크리스토프 배치의 연기는 연기인지 실생활인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아트영화를 지향한 듯 난해하다.
특히 특정한 이야기가 없어서 감상에 따라 이 산으로도 저 산으로도 갈 수 있다. 그런 무정형의 여행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반길만하지만 정해진 목표를 가려는 관객은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겠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