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지친 몸뚱아리 하나 언덕을 넘는다.
가시밭 거쳐 격랑을 건너며 온통 상처뿐인 육신으로,
탄식도 아우성도 뒤로 한 채 적막한 밤길을 지난다.
가라, 가라… 불신의 차가운 눈빛도, 이간의 교활한 혓바닥도,
섬뜩한 배신의 몸짓도 이제는 모두 가라.
소리 죽여 맨 바닥을 기고 긴뒤 겨우 견디어 낸 고단한 허물 하나만 덩그러니 남겨놓고
이 어둠 넘어 멀리 멀리 가라.


용 꼬리 밀쳐내고 장한 뱀 대가리가 되겠노라 호기롭게 시작했던 검은 뱀(黑巳)의 해 계사년이 어느덧 저물어갑니다. 언제나 처럼 그 끄트머리에 서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 봅니다. 너는 과연 뱀의 대가리였는가, 뱀의 대가리가 되고자 했는가.

변명거리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경제가 어려웠어요, 사회도 어수선했고요. 미세먼지 뒤덮인 하늘처럼 미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어요….

맞습니다. 정답 없는 질문지를 푸는 것처럼, 애를 써도 달라지지 않고, 기를 써도 이룰 수 없는 삶은 너무도 고통스럽습니다.

지난 한 해가 꼭 그랬습니다. 누군가는 취업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부모님 얼굴 떠올리며 눈물 삼켰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가족들에게 실직의 고통을 내비치지 않으려 매일 새벽 거친 숨 몰아쉬며 산에 올랐을 것입니다.

빈 장바구니로 온종일 시장통을 헤매다 값싼 찬거리 한 두개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주부, 등록금을 구하지 못해 군입대를 결정해야 했던 대학생, 닫힌 공장문 앞에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물어야 했던 중소기업인… 주위에는 모두 아픈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그럼 우리 어떻게 버텼을까요. 어찌 이 고단한 삶 견뎌내며 지금 여기에 서 있을까요.

힘에 겨워 주저앉아 있을때 누군가가 내밀어 준 손길 하나가 우리를 거짓말처럼 일으켜 세우지 않았던가요.

거친 숨 몰아쉬며 이제 그만 멈춰서고 싶었을 때 누군가가 건네 준 물 한잔이 우리를 다시금 내닫게 하지 않았던가요. 희망이 없다고, 희망이 없다고 고개를 떨구는 동안 우리는 그것이 희망인지도 모른 채 서로를 꼭 안아주고 손을 잡아주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고단한 허물 하나 덩그러니 남겨놓고 떠나는 계사년의 끄트머리, 다시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 봅니다.
너는 과연 누군가에게 희망이었는가, 희망이 되고자 했는가.

-충북 단양 보발재에서-

글/배상록 정치부장
사진/김종택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