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청 이사장이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성북동 옛 정취와 닮은 미소로 맞아준다. 한 이사장은 의학계의 원로이다.
영상의학 분야에 남긴 그의 족적은 걸출하다. 서울대학교병원장을 지냈고 세계방사선의학회 종신명예회원이다. 그가 걸어 온 의업(醫業)의 자취만으로도 인터뷰 주제는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만화라니. 한 이사장은 2001년부터 '국민경제과학만화운동본부'를 이끌어 왔다. 1934년 생이니 치열하게 정진해온 의료 현업에서 물러난 뒤에 묵묵하게 정진해 온 운동이다.
"이공계를 살려야 한다는 분들의 뜻을 모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과학진흥운동을 벌여보자는 의도였지."
공부 좀 하는 청소년들이 법과 경영에 몰려 과학이 소홀히 여겨지는 양상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청소년들이 대상이니 자연스럽게 선택한 매체가 만화.
이후 운동본부는 '국민은 신바람 이공계 짱' 등 과학만화 20여 권을 발간해 전국 초·중·고에 무료 배포해왔다.
운동본부는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만화 주제를 과학에서 역사로 전환한다. 대한민국 청소년 역사교육이 비판의 도마에 오른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정말 이래서야 되겠냐는 우려가 들었습니다. 청소년들의 역사관 국가관 결핍은 미래의 재앙이니까요."
한 이사장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시비와 역사왜곡이 심각해지는 상황을 반영해 올해 발간 역사만화 제목을 '3·1절 대한독립만세'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올해로 3·1독립운동 95주년이 됐어요. 그런데 청소년들은 물론 많은 국민들이 3·1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니 큰 일이다 싶었지. 일본은 아베 총리가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역사적 반성은커녕 대대적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200만명이 참가한 3·1독립운동이 왜 일어났으며, 평화적인 시위를 총칼로 진압한 일제의 잔학상을 역사적 사실로 청소년들에게 제대로 알려주자는데 발간위원들의 뜻이 일치했습니다."
운동본부는 해마다 발간위원회를 구성해 만화의 주제를 결정한다. '3·1절 대한독립만세' 발간위원회에는 김종필, 이홍구, 이한동, 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김종인 전 청와대경제수석이 명예위원장으로 참여했다.
역대 총리들이 보수와 진보 구분 없이 동참한데서 일본 역사왜곡에 대한 원로들의 우려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3·1독립운동은 대한민국 역사의 시원입니다.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민족정신의 기초인데요.
"맞아요. 우리나라는 1910년의 한일합병조약으로 1945년까지 일제강점시대를 겪지요. 특히 1910년부터 약 10년동안 이뤄진 일본의 통치를 '무단통치'라고 부릅니다. 데라우치가 조선 사람은 복종 아니면 죽음, 둘 중 하나라고 공언할 정도였지요. 식민통치의 초반에 일제는 한민족의 자유를 잔인하게 압살하고 경제수탈을 악랄하게 자행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 국민의 저항의지는 높아졌지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를 피해 간도와 연해주 등으로 탈출해 독립운동을 계획합니다. 이러한 의지가 모여 1919년 3월 1일, 일본에 항거하는 거족적인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난거지요."
조국의 암담한 어둠에 갇혀있던 그 시절. 한 이사장의 부친 월봉 한기악 선생도 만주로 망명을 감행한다.
1898년 구한말에 태어난 월봉은 3·1운동 이후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과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임시의정원 의원과 법무부 위원에 선임된 독립운동가.
귀국해서는 동아일보, 시대일보,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민족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의 필봉을 휘둘렀다.
신간회 발기인 중 1인인 월봉은 끝내 조국 독립을 못보고 1941년 독립투사의 삶을 마감했다. 한 이사장이 8살 때의 일이다. 한 이사장이 역사를 소홀히 할 수 없는데는 이런 가문의 배경이 버티고 있다.
-3·1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한번 새겨주시지요.
"3·1독립운동은 수많은 희생자들을 남겼지만 독립에 이르지는 못했어요. 하나 독립을 향한 자주정신, 민족정신을 보여주고 민주주의를 향한 시발점이라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전세계에 일제의 잔인함을 고발하고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보여준 것 또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후 거의 모든 독립운동 세력은 3·1독립운동을 자신들의 모태로 여겼고, 독립운동의 역사적 당위와 논거로 3·1독립운동을 앞세웠으니 역사적 이정표라 규정하는게 당연하지요. 대한민국의 출발점으로 말이에요."
-청소년들의 역사인식 결핍은 결국 어른들의 잘못 아닙니까.
"맞아요. 역사교육이 허술해지면서 청소년들이 주변국과 우리가 맺고 있는 현실적 관계에 무지한 상황이 일반화되고 있으니 걱정이지요. 6·25전쟁이 언제 일어난 일인지 모르는 청소년들이 절반이 넘는다네요. 몇 년째 논란이 되는 야스쿠니 신사가 무엇인지 묻는 설문에 대다수 국민들이 '모른다'라는 답변을 내놓습니다. 뭔지 알아야 대응할텐데 말이지요. 야스쿠니 신사의 '신사(神社)'를 젠틀맨이라고 답하는 사람들도 있다니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안타깝지요. 국민들의 역사의식이 낮은데다 일본의 끊임없는 역사 왜곡과 도발이 맞물리면서 역사교육의 필요성이 자연스러워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에요. 이런 기운을 빌려 역사교육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확실하게 만들어내야 해요. 역사 없는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하잖아요. 역사 교육을 통해 순결한 민족적 정체성을 갖춘 국민들을 양성하는 일이 대한민국 미래를 만드는 일이라는 걸 깨달을 때가 됐어요."
-그래서 올해 만화제목이 '3·1절 대한독립만세'가 됐군요. 그런데 역사계몽운동이라면 만화가 좀 가볍지 않을까요.
"청소년들이 3·1독립운동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감수했습니다. 영상세대인 요즘 젊은이에게는 만화라는 매체의 전달력이 강력해요.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전달하는데 최적이에요. 많은 청소년들이 저희 만화책을 통해 우리 역사를 조금이라도 가슴 속에 남겨둘 수 있으면 대만족입니다. 그것이 기본이 되어 시간이 흐르면 더 큰 지식으로 발전할거라 믿습니다."
-국민경제과학만화운동본부가 하는 일을 알려주시지요.
"크게 과학기술 관련 만화와 역사교육 만화를 발간해 무료 배포하는 일이 주된 사업이에요. 초·중·고 학생들에게 설문을 돌리면 장래 희망란에 '과학자'라고 쓴 학생들은 10%정도라고 해요. 학년이 올라갈수록 과학이 재미없어지면서 장래 희망 목록에서 과학자가 사라지는 겁니다. 국가 장래에 도움이 안되는 풍토입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과학에 관심을 갖게하는 동기를 주자는 생각에 과학만화를 발간하기 시작한게 벌써 10년 훌쩍 넘었네요.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 분야를 주목해 '8·15 광복절', '6·25전쟁' 등 잊혀져 가는 역사를 만화로 담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인데요….
"그래 돈이 가장 문제야.(웃음) 아무리 좋은 교재라도 전달돼야 의미가 있으니 그렇지요. 순수한 민간운동인데다 최근에는 역사문제에 천착하다보니 아무 돈이나 받기 힘든 점이 있어요. 그러니 뜻 있는 단체나 독지가의 도움이 절실해요. 많은 분들이 도움을 약속했지만 그래도 부족한 건 사실이지."
한 이사장과 인터뷰는 '행동하는 원로'를 목격하는 보람이 컸다. 원로의 조언과 충고에 조롱으로 화답(?)하는 세태에서, 동시대의 후배 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묵묵히 수행하는 원로를 만나는 일이 어디 그리 흔한가.
한 이사장은 최근 재판을 찍은 자신의 저서 '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돼라'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기자에게 건넸다.
1998년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도 거뜬히 회복한 투병기다. 한 이사장이 조크로 인터뷰를 끝냈다. "책을 주긴 주는데 읽을 일은 없는게 좋지. 하하하."
국민경제과학만화운동본부는 해마다 만화 발간 계획을 세운뒤 발간위원회를 구성한다. 대부분 각 분야 원로들로 구성된다. 이들의 인적 네트워크가 발간의 주요 원동력이다.
그러나 한번에 20만권을 발간해 학교와 도서관에 무료배포하니 비용이 만만치 않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라면 동참을 권해본다.
운동본부 : (02)741-9200
▼한만청 이사장은
■ 출생 1934년
■ 학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의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의학박사)
■ 경력
(전)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조교수
(전)미국 하버드대학교 연수
(전)방사선의학회 회장
(전)방사선방어학회 회장
(전)아·태심혈관및중재적방사선학회 회장
(전)서울대학교병원 원장
(전)산학연협동연구소 이사장
세계방사선의학회 종신명예회원
북미방사선의학회 명예회원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원로회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산학연장학재단 이사장
■ 상훈
보사부장관표창
대한방사선의학회학술상
분쉬의학상 (대한의학회·한국베링거인겔하임)
함춘대상(서울의대 동창회) 학술연구 부문
/대담·글= 윤인수 문화부장
/사진 =김종택 사진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