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 지순택선생 전통제작기법 전수 받아
20대 정권 실세 도평요 요장 맡아 유명세
1986년 이천에 한도요 설립… 日개인전도

자존심 건 싸움 기대이하 작품 깨부수기
국내수요 적은탓 젊은층 관심 부족 씁쓸
1990년대 끊긴 중요무형문화재 지정바라

- 경기도 무형문화재 한도(韓陶) 서광수 도자 명장

이천시 신둔면, 명장의 가마는 남정리 호젓한 숲속에 저 홀로 있었다. 3번 국도에서 가까운 때문인지 전원주택들이 단단히 호위를 하는 통에 길을 잘못들었나 의심이 들 무렵 서광수 명장의 한도요(韓陶窯)가 화사한 표정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도공 서광수가 남정리에 가마를 짓고 불을 넣기 시작한 때가 1986년이니,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도요는 제뜻과 상관없이 점점 속세와 가까워진 모양이다.

하나 그 세월에도 전통 예술도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여전히 미미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인가. 3월 초에 찾아간 전통도예의 요람 한도요의 자태는 고고한 듯 외로워 보였다.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1호이자 대한민국명장(도자기공예) 14호 한도 서광수는 전통방식으로 도자예술을 이어가고 있는 국내 몇 안남은 명실상부한 도공이다.

1948년 이천에서 태어나 신둔초등학교를 졸업한 1961년, 열네살 부터 흙 다지고 물레 돌리며 가마에 불 넣으며 살아 온 세월이 반세기를 훌쩍 넘겼다.

"너나 없이 어려웠던 시절 아닙니까. 초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생업을 찾아야 했고 그렇게 도공이 됐지요."

5형제 중 둘째였던 한도를 따라 남은 형제들도 줄줄이 도공의 길로 들어섰다. 처음엔 그릇공장에서 기술을 배우던 한도는 1965년 도암 지순택(1912~1993)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도자기술자로 끝날 뻔했던 자신의 운명을 도자예술가로 전복시키는 행운을 얻는다.

백자의 대가로 경기도 지정문화재 4호였던 도암으로부터 제자 한도는 도자기의 전통적인 제작기법을 전수받으면서 도자 예술세계에 젖어들었다.

"11년이에요. 도암 선생으로부터 수비질에서 태토, 성형, 조각, 유약, 소성을 전부 배웠어요. 도암 선생은 다른 선생들과는 달리 청자, 백자, 분청을 비롯해 전분야에서 탁월했던 분이었지. 그게 도자기마다 흙과 유약은 물론이고 불까지 다 다르거든. 그 분 밑에서 도자기에 눈을 뜰 수 있었지. 도암 선생은 도자기를 보는 눈이 남 달랐어요. 골동품을 가져다 놓고 그대로 재현하느라 애쓰던 모습이 눈에 선하네."

한도 서광수의 자질은 뛰어났던 모양이다. 24살 되던 해인 1971년 지순택요(窯)의 성형실장을 거쳐 3년 뒤에는 불을 주관하는 소성을 담당하기에 이른다. 도암이 가르칠 건 다 가르쳤다 인정한 셈이다.

그러다 1976년 3공화국의 실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운영했던 도평요로 자리를 옮겨 요장(窯長)을 맡아 10년을 보낸다.

"당시 잘 나가던 기업의 월급쟁이들이 월 7만~8만원을 받을 때 나는 20만원 넘게 받았어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정권 실세에게 파격적인 대우로 스카우트될 만큼 30이 되기도 전에 그는 도암 지순택, 해강 유근형 등 이천도자 1세대의 맥을 이을 후기지수로 손꼽힌 것이다. 그러다 서광수는 1986년 지금 자리에 한도요를 세우고 독립한다.

-처음 요를 세우셨을 때 독립했다는 감회가 상당했겠습니다.

"물론이에요. 전통 도자제작 수련을 받을 만큼 받았다 생각했고 내 이름으로 된 작품을 할 자신이 있었으니 독립한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어려웠어요. 전통을 계승한다는 자부심만으로는 요를 운영하기 힘들더라 이거죠. 그 시절 이미 전통가마는 사라지고 가스가마가 번지기 시작했어요. 또 예술 도자기보다는 생활자기가 각광을 받았고…. 한마디로 가마에 구워 몇 점 건져낸 내 작품을 팔 데가 없었던거지."

한도요는 설립 이래 지금까지 1년에 평균 4번 정도 가마에 불을 댕긴다. 전통방식을 고집하는 서광수 명장이 흙을 고르고 반죽을 만들어 물레 성형을 마친뒤 조각하거나 그림을 입힌 뒤 유약을 발라 초벌과 재벌의 과정을 거치는 과정에 3개월 가량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6칸 가마에 쟁이는 작품이 150여점. 그나마 그의 자존심에 미달하는 작품을 깨부수고 나면 50점 건지기가 빠듯하다. 이러니 성형틀로 찍어내 가스가마로 대량 생산되는 생활자기와는 처음부터 경쟁이 어려웠던 건 당연했다.

-어떻게 그 고비를 넘기셨나요.

"얄궂죠. 일본 사람들이 제 작품을 주목했어요. 전통 예술 도자기의 가치를 알아 본 일본 도자 애호가들이 내 작품에 반했던 모양인지 한점 두점 사가더라구요. 그래서 안타까운 건 나뿐 아니라 우리나라 유명 도예가들의 좋은 작품 대부분이 일본에 있다는거지. 하지만 난 그 덕분에 버틸 수 있었으니 다행인지 아닌지 착잡하지요."

실제로 한도 서광수는 국내보다는 일본에서 더 유명하다. 1998년 이후 도쿄, 후쿠오카 등 일본에서만 수십차례의 개인전을 열었고, 일본의 '한도 마니아' 70여명은 아예 후원회를 결성해 그의 일본 활동을 적극 지원한다.

-선생님은 특히 달항아리가 유명하십니다.

"무지백자(달항아리)는 도공에게 가장 큰 도전이에요. 사람 눈을 유혹하는 문양이나 조각이 일절 없이 오직 불이 빚어낸 색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니까요."

그의 달항아리는 유백색을 띠지만 작품마다 전혀 다른 감흥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불에 따라 유백색 달항아리는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다.

유약 말고는 인간의 간섭을 일절 배제한 달항아리는 보는 이에게 각자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단순한 유백색 형태에 담긴 일체유심조의 미학인 셈이다. 달항아리의 유백색은 그가 따로 개발한 유약으로만 가능해 그 누구도 흉내가 불가능하다.

인터뷰를 진행한 한도요 전시장은 그가 팔기를 주저해 남겨놓은 작품 수백점으로 가득하다. 백자, 청자, 분청이 그가 입혀준 색과 조각과 그림으로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화려하게 피어있다.

"장래에 박물관을 마련할 요량으로 모았다"면서도 "글쎄 그 만한 돈을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을 흐린다. 달항아리 한점에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그의 명성을 들은 터라 뜻밖의 탄식에 당황했다.

-실제로 예술도자에 대한 국내 수요는 어떤가요.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전통을 고집하며 가마를 운영하기에는 버거운게 사실이에요. 사실 제 작품을 개인이 구입하기에는 힘에 부친게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전통도자 보급이랍시고 헐 값에 팔 수도 없고, 또 그랬다가는 한도요 당장 망할겁니다. 그래서 돈 많은 기업들이 전통도자예술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시장을 형성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그나마 한 15년 전부터 차문화가 확산되면서 다완이 많이 나가면서 점점 관상용 자기 판매도 늘고 있지만 전통적인 제작방식을 유지하는 비용을 감당하기는 여전히 힘들어요.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전통 도예를 감당하려 들지 않지요."

한도요가 가마에 한번 불을 지피려면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든다. 화목으로 화력이 센 강원도 소나무만 쓰는데 나무값만 1천만원이 든다.

하동 백토, 서산 물토, 양구 백토와 전국에서 장석, 대리석, 석회석을 모아 태토를 만들고 유약을 만드는데는 정성은 물론 비용이 들어가니 한번 작업에 수천만원이 소요된다.

그러고도 달항아리 한 점 구하면 다행이니 처음부터 수지타산이 설리 없다. 그나마 서광수 명장은 국내 후원회의 도움을 받아 큰 짐을 던다.

박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이 회장으로 있는 서광수 후원회는 한도의 물질적, 정신적 후원을 아끼지 않는다.

한도 서광수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41호이자, 노동부가 인증한 대한민국 명장이다. 즉 예술과 기술의 경계 양쪽의 인증을 갖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한도는 자신을 한번도 기술자로 생각한 적이 없다.

그는 도공을 "불로써 흙에 생명을 불어넣는 예술가"로 자부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하나의 희망이 있다.

"2009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신청했어요. 전통도예의 맥이 끊어질 위기에 있는 만큼 정부가 전통도예의 명맥을 이어주기 바람이 큽니다."

문경 김정옥 사기장이 90년대 중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도예계에서는 소위 인간문화재 지정이 전무했다.

한도는 "한국 전통문화의 백미인 도자예술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절실하다"며 "번번이 미뤄져 온 심사가 올해는 꼭 이루어지기 바란다"고 말했다.

한도가 취재진을 가마터로 이끈다. 일체의 기계장치를 볼 수 없는 한도요에서 6칸 가마는 그 위세가 압도적이다.

"지난 1월 불을 넣고 나서 한칸을 허물지 않고 그냥 뒀지. 한번 허물어 볼까…."

가마 한칸 옆구리를 헐어내자 그 안에 20여점의 백자들이 처녀처럼 수줍게 앉아있다. 하지만 다 들어낸 작품에서 타작들을 골라낸 한도 서광수. 언제 들었는지 모를 망치로 냅다 옆구리를 내려친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그의 자존심이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한도 서광수는

■ 출생-1948년, 이천

■ 작품활동-제1회 한국전승도예협회 회원전(1981), 세계 미술협회 회원전(1992), 한국전통 공예가협회전(1996), 한국도예 5인전/일본 초청전(1997), 한·미 문화제전 주최 미주순회전(1998), 프랑스 한국문화원 초청전/캐나다 한국도자전(2002), 중국 경덕진 천년제 초청전(2004), 도공 50년 기념전(2011) 

■ 상훈-경기도지사 표창, 문화관광부장관 표창, 대한민국 명장 14호, 경기도무형문화재 41호

/대담·글 =윤인수 문화부장
/사진 =김종택 사진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