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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은 정몽주 선생 묘역 입구에서 바라본 전경. 왼쪽으로 재실인 영모재와 모현당 등이 보이고 뒤편 중앙에 정몽주의 묘가 자리해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묘가 저헌 이석형의 묘. |
흉한 기운없고 토체 두곳 '명당중의 명당'
조선시대부터 많은 명문세가 터전 일궈
뛰어난 인물의 좋은 묏자리 곳곳에 위치
뛰어난 인물과 훌륭한 가문이 좋은 명당을 찾아 묘를 쓰니, 그 명성과 부귀영화가 대대손손 이어지는구나.
경기도 일대의 여러 시·군 중에서 근래의 용인(龍仁)만큼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세간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 곳이 또 있을까?
한적하고 조용한 지역에서 부동산 열풍의 중심으로, 가장 거주하고 싶은 지역에서 난개발과 잘못된 행정의 표본으로 오르락 내리락하는 동안, 어느새 용인은 인구 100만명을 바라보는 거대도시가 됐다.
단 20~30년 사이에 이뤄진 이런 급격한 개발은 용인의 모습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고, 이때문에 용인을 '뿌리없는 신도시'라고 여기는 이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용인은 오래전 조선시대부터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용인이씨, 영일정씨, 연안이씨, 해주오씨, 우봉이씨 등 명문세가들이 터를 잡고 가문을 발전시켜온 유서깊은 고장이다.
이때문에 용인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인물과 가문의 묘소들이 곳곳에 남아있어, 지금도 풍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흔히 사람들이 용인을 이야기할때 꼭 한번씩 떠올리는 말이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去龍仁)'이라는 말이지요. 살아서는 진천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이 좋다는 뜻으로 알고 있고, 그때문에 용인이 풍수적으로 뛰어난 곳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이 말의 유래를 찾아보면 대부분 풍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풍수와 관련된 오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재미있게도, 용인에는 뛰어난 인물의 묘와 좋은 가문의 묘역이 많아서 마치 명당이 많은 곳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것 또한 용인이 가진 복(福)이 아닐까 싶어요."
'생거진천 사거용인'의 유래 중 하나를 소개하면서 조광 선생은 "사실 용인은 풍수적으로 눈에 띄게 뛰어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런데도 용인에 이름난 묘가 많은 것에 대해 "풍수를 제대로 보아가며 조상의 묘를 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좋은 묏자리를 찾아 쓸 만큼 권세가 있는 가문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의 묘는 모현면 능원리에 조성돼 있는데, 풍수가들뿐 아니라 수많은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져 그의 명성만큼 묘역도 이름을 얻고 있다.
그의 묘역을 향해 오르다 보면 묘역 오른쪽으로 나란히 또다른 묘가 조성돼 있는데 연안이씨의 거두 중 한사람인 저헌 이석형(李石亨·1415 ~ 1477)의 묘다.
영일(迎日·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정씨인 정몽주의 묘와 연안(延安·지금의 황해도 연백)이씨인 이석형의 묘가 나란히 놓이게 된 것은 정몽주의 증손녀를 정경부인으로 맞은 이석형의 남다른 인연 때문이다.
묘역 입구에 놓인 '포은 정몽주 선생 묘소로 가는 길'이라는 커다란 표지석과 연안이씨 가문의 비석들을 지나면 정갈하게 가꿔진 묘역이 펼쳐진다.
묘역 아래에는 재실과 인공연못이 조성돼 있고, 묘역으로 오르는 길에는 점점이 답석이 놓여 운치를 더한다. 묘역을 올라 주변을 둘러보자 '명당중의 명당'이라는 칭찬이 빈말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이렇게 나란히 명당자리가 나오기도 어려워요. 두 분의 묘가 모두 맥을 잘 타고 자리를 잡은데다가, 사방을 두른 산들의 모양이 부드럽고 예뻐서 흉(凶)한 기운이 없어요. 게다가 앞쪽으로 높은 사람을 상대하게 된다는 토체(土體·사다리꼴 모양의 산)가 두개나 자리해 있고, 좌청룡·우백호가 모두 뚜렷하고 기운차게 이어져서 돈과 명예를 모두 얻는 자리입니다."
묘역을 내려와 보니 묘역 입구에는 유명한 등잔박물관과 분위기 있는 카페가 자리를 잡고 관람객들에게 '좀 쉬었다 가라'며 손짓을 한다.
갈 곳이 많아 아쉬움을 남겨둔 채 두번째 장소인 모현면 오산리 해주오씨 추탄공파(海州吳氏 湫灘公派) 묘역으로 향했다.
용인의 대표적인 세거성씨 중 하나인 해주오씨는 이곳에 오래전부터 종중의 묘역을 조성해 놓았다. 은행나무를 줄지어 심어놓은 묘역 입구를 지나면, 20여기의 묘가 자리를 잡고 있는 잘 정돈된 넓은 묘역이 푸근하게 반긴다.
묘역 앞에는 육중한 비석을 세워놓았고, 널찍한 연못을 파 '재물'을 의미하는 물이 골짜기로 빠져 나가지 않도록 했다.
"이곳에서 눈여겨 볼 것은 이 많은 묘들이 하나같이 맥을 타고 자리를 잡았다는 겁니다. 풍수에서는 이렇게 맥을 타고 흘러온 땅의 기운이 모이는 곳에 묘를 쓰는데, 이를 혈(穴)이라고 합니다. 요즘 산소들 중에는 풍수를 무시하고 맥이 아닌 골에 조성한 것들이 많은데, 물이 흐르고 음습한 기운이 나기 때문에 묘의 주인에게도, 후손에게도 모두 좋지 않게 됩니다. 이곳 해주오씨 가문은 맥을 타고 산소를 썼다는 점에서 풍수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광 선생은 한 곳에 수십기의 묘를 모아 놓으면서도 풍수에 어긋나게 쓰지 않은 해주오씨 가문을 칭찬하면서 "명당을 찾아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힘이 닿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풍수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세번째로 취재팀은 기흥구 상현동에 있는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개혁가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묘를 찾았다.
조광조는 유교적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개혁을 시도하다가 기묘사화로 인해 좌절한 비운의 인물이다. 선조때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됐으며, 율곡 이이는 그를 김굉필·정여창·이언적 등과 함께 동방사현(東方四賢)으로 꼽기도 했다.
조광조의 묘를 오르는 등산로 입구에는 그를 소개하는 소박한 안내판이 서 있다. 하지만 낮은 언덕 중턱에 자리한 조광조의 묘는 사림의 거두였던 그의 명성에 비해 평범하기 그지 없다. 눈앞을 43번국도가 가르며 지나고, 그 너머로는 높은 고층아파트들이 줄지어 서서 시선을 가린다.
"정몽주의 묘나 해주오씨 오윤겸 묘와 달리, 조광조의 묘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은 상황에서 경황이 없다보니 좋은 자리를 찾지 못한 듯합니다. 게다가 주변이 대부분 개발로 인해 원형이 훼손돼 풍수적으로 큰 의미를 두기가 어렵게 됐습니다."
조광조의 묘역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뜻하지 않게 인근에서 용인의 토착 가문인 용인이씨의 묘역을 만났다. 좌청룡과 우백호가 뚜렷하게 감싸안은 용인이씨 묘역은 여전히 옛 영광을 잃지 않은 가문의 힘을 보여주듯 잘 정돈돼 있다.
조광 선생은 "뛰어난 가문은 그 권력과 재력으로 좋은 곳에 묘를 써 후손들이 더욱 번창하고, 어려운 이들은 풍수를 이해조차 못한채 쓰지 말아야 할 곳에 묘를 써 더욱 어렵게 되는 법"이라며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많은 사람들이 풍수를 알고 실천해야 한다"는 조언으로 용인 둘러보기 첫편을 정리했다.
글/박상일기자
사진/김종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