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당시 인천미두취인소. /인천중구를사랑하는사람들모임 제공
▲1910년 새 터를 잡은 인천미두취인소는 현재 KB국민은행 신포동지점(인천시 중구 제물량로 196)에 있었다. 인천미두취인소는 1939년 문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곳에 있었다. /조재현기자 그래픽/박성현기자
1896년 일본이 가격안정 등 명분으로 '인천미두취인소' 세워
쌀 거래통한 시세차익 얻는 '투기'… 국내자본 수탈 목적
사실주의 작가 채만식·이광수도 '미두열풍' 상세히 다뤄
중동우체국 인근 머물며 돈 따는 날 유흥즐겨 경제에 영향
카페 '금파' 있던 신포문화의거리 주변은 요릿집·술집 문전성시


'강보에 싼 인천의 어린 아이도 합백(合百)과 투기를 안다.'

1939년 11월 19일 동아일보는 미두장의 변화상을 다룬 기획기사 '흥망의 환무(幻舞) 반세기'를 실으면서 당시 인천을 이렇게 한마디로 표현했다.

인천이 온통 미두와 관련한 투기장이었다는 얘기다. 여기 나오는 합백은 공인받지 않은 사설 미두 도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천은 1910년대부터 군산, 부산 등을 제치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쌀과 콩을 수출하는 항구 도시가 됐고 동시에 투기의 일종인 '미두(米豆)'가 가장 성행한 곳이 됐다. 미두는 일정한 날짜를 정해 놓고 그 기간 내에 쌀을 사거나 팔아 시세 차익을 얻는 방식이다.

항상 돈을 잃는 사람 만큼 따는 쪽이 생겨 '제로섬 게임'과 같았다. 1896년 일본인들이 미곡 수매 편의, 가격 안정화, 쌀의 질적 향상이라는 미명하에 세운 인천미두취인소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수원에 살던 부부가 인천에서 미두에 실패해 모루히네(모르핀)를 먹고 같이 죽었다'(동아일보·1922년 6월 15일)거나 '인천경찰이 절치기꾼(미두할 밑천이 없어 적은 돈으로 불법 도박을 하는 이들·하바꾼)에 엄중 경고를 했다. 어떤 효과를 낼지 주목된다'(중외일보·1927년 11월 19일)는 등의 소식이 연일 신문에 실렸다. 사람들의 관심이 인천으로 자연스럽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최고 인기 작가로 꼽힌 채만식과 이광수도 인천과 미두에 관심을 뒀다. 이들은 현실의 문제를 면밀히 관찰해 그대로 원고지에 옮긴 '사실주의' 성향이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인천 미두 열풍이 이들의 글감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20년대 당시 카페 '금파' 모습. 건물과 양쪽 길 모양이 현재와 거의 같다. /인천중구를사랑하는사람들모임 제공
▲신포 문화의 거리 내 청실홍실은 1920년대 카페 '금파' 자리다. 금파가 있던 건물 모양은 그대로지만 건물 양 옆으로 즐비하게 들어서 있던 고급 요릿집과 술집은 사라졌다. /조재현기자
# 소설 속 미두와 인천


인천미두취인소는 거래가 늘어남과 동시에 그 순기능을 잃고 중매점 인가권을 쥐고 휘두르며 철저히 국내 자본 수탈의 도구 역할을 했다. 1930년 인천 내 미두 중매점은 40여 개소에 이르렀지만, 조선인 운영자는 단 3명 뿐이었다.

더욱이 일본 오사카 증권거래소의 미곡 시세를 기준으로 쌀을 사고 팔았기에 조선 미두꾼들이 이익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인천은 날마다 미두꾼들이 몰려 인생을 건 도전을 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근거없는 일확천금 소식이 미두꾼들을 더 자극했다. '대박났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지방에서 논, 밭을 팔아 올라온 농사꾼 아무개였기에 미두에 희망을 거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그럴수록 재산을 순식간에 잃고 절망에 빠지는 사람도 늘었다.

채만식이 1940년 '인문평론(人文評論)'에 발표한 희곡 '당랑의 전설'은 이런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작품 속 박 진사는 20여 명의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지만 가세가 기운다.

이에 장남 원석은 큰돈을 벌 목적으로 단박에 인천미두취인소를 찾아가 미두를 한다. 하지만 원석 역시 대부분의 미두꾼과 마찬가지로 전 재산을 잃는다.

의복은 땟국과 땀으로 휘감기고 얼굴엔 윤기가 없고 한 데에 완전히 일치가 되는 하바꾼, 돈 떨어진 마바라, 옥관, 구경꾼이 한떼 궁중이 미리서 등장해서 있어가지고 서로들 분주히 납뛰고 지껄이며 떠들고 하는 중에도 하바꾼들은 이 구석 저 구석, 둘씩 셋씩 모여 서서 고개를 처박고 쑥덕쑥덕하면서 간혹 돈을 서로 주고받고 하고 돈 떨어진 미두꾼들은, 혼자서 혹은 무더기로 넋을 놓고 우두커니 미두장을 바라다 보고 섰다. (중략) 그 많은 얼굴들이 만족 아니면 실망, 두 가지 표정으로 판연하게 갈려서 통일이 되어 있다.

이에 앞서 채만식은 1937~1938년 조선일보에 소설 '탁류'(濁流)를 연재했는데 여기서도 미두와 얽힌 인천 이야기를 쓴다.

미상불 미두장이가 울기들을 잘한다. 옛날 축현역 앞에 있던 연못은 미두장이의 눈물로 물이 괴었다고 이르는 말이 있다. 망건 쓰고 귀 안 뺀 촌샌님들이 도무지 어쩐 영문인 줄 모르게 살림이 요모로 조모로 오그라들라치면 초조한 끝에 허욕이 난다. (중략) 좀 똑똑하다는 축이 일확천금의 큰 뜻을 품고 인천으로 쫓아온다. 와서는 개개 밑천을 홀라당 불러버리고 맨손으로 돌아선다.

축현역은 현재 동인천역이다. 미두 중매점에 가기 위해 인천을 찾는 외지인들은 대부분 동인천역으로 드나들었다.

채만식 문학에 대한 논문을 쓴 유봉희 박사는 "형 명식이 미두를 해서 가세가 몰락하는 바람에 채만식이 와세다대학을 중퇴하게 됐다는 친구의 증언도 있다"며 "개인사 때문에 인천과 미두에 대한 채만식의 관심은 더 유별났고, 그럴수록 서술은 세세하고 사실감이 높아졌다"고 해석했다.

# 미두꾼, 인천 경제에 활력을 넣다

이광수가 1924~1925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재생'에서 남주인공 봉구가 사랑했던 여인 순영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취직하는 곳이 인천미두취인소다.

그 밖에도 각처에서 미두 하러 와서 묵는 손님을 찾아다니며 주문을 받아 오는 것이 그의 일이다. 이것을 거간이라고 한다. (중략) 그리해서 제이의 반복창이가 되되. 그보다 더욱 큰 반복창이 되자 하고 결심한 것이다. 이렇게 되는 길 밖에는 맘껏 순영의 원수를 갚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반복창은 인천에서 미두를 해서 하루에 지금 돈으로 15억원을 벌었을 정도로 '미두 갑부'의 상징이었다. 제2, 제3의 반복창이 될 것이란 기대를 안고 너나없이 인천 미두에 뛰어들었던 세태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런 '미두 왕' 반복창도 역시 미두로 쫄딱 망했다.

인천을 찾은 미두꾼들은 미두 중매소와 가까우면서도 값이 싼 숙소를 찾아 짐을 풀고 하숙했다. 또 돈을 따는 날이면 으레 유흥을 즐겼다. 몰려든 미두꾼들이 먹고, 자고, 놀면서 푼 돈이 인천 경제의 활력소 구실도 했다.

미두꾼들이 주로 거주한 곳은 인천중동우체국(중구 제물량로 183) 맞은편과 현재 신포구민문화센터 일대였다고 한다. 더불어 카페 '금파'가 있던 신포 문화의 거리내 청실홍실 건물 양 옆으로 난 길에는 고급 요릿집과 술집이 즐비했고 문전성시를 이뤘단다.

1925년, 경성주식현물시장과 인천미두취인소를 합병해 서울로 옮겨 가려고 시도했을 때 인천 사람들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은 이런 점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반발에 밀리고는 했던 인천미두취인소 합병은 1932년에 가서야 성사됐다.

장회숙 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 대표는 "미두꾼들은 허황된 꿈을 깨지 못해 인천에 '피 빨아먹는 악당굴'이라는 오명을 안겼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인천 경제를 굴리는 단단한 한 축이었다"며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의 욕구는 오늘날도 여전하다. 다만 미두가 사라지고 로또 같은 새로운 형태가 생겨났을 뿐"이라고 했다.

글 = 박석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