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미도에 가면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를 볼 수 있다. 한국전쟁 후 출입이 통제됐지만 2009년부터 개방됐다. 함세덕 생전에 팔미도는 송림이 울창하고, 물이 맑고, 낚시터가 유명한 섬이었다. /경인일보 DB
신춘문예 당선작… 통속극과 차별화
절제미와 낭만성 돋보이는 가작 평가
인천 출신중에 문학사 비중있는 인물
동승으로 유명 한국 연극 기반마련도
인천상업학교 시절이 '극작가 밑거름'
1941년 유치진이 세운 현대극장 참여


극작가 함세덕(咸世德·1915~1950)하면 '동승(童僧)'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깊은 산속 작은 절에서 수행하는 동자승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내용의 이 작품은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수록돼 있다.

2003년에는 영화로 개봉돼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고, 세계 30여개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우리는 이 함세덕의 서정극 중 '해연(海燕)'을 놓칠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세워진 팔미도를 배경으로 한 유일무이한 작품으로 194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해연'은 당대 희곡의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다.

스물여섯 함세덕은 신춘문예 당선 소감에서 "순수한 극작가가 없고 소설가의 여기(餘技)로써 희곡이 존재"했다며 선배들을 비판하는 패기를 보이기도 했다. '해연'은 멜로드라마로 대중성을 확보하면서도 당시 인기를 끌었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같은 통속극과 차별화를 꾀했다.

'동승'에서 선보인 함세덕 특유의 '낭만성'과 '서정성'은 '해연'에서 절정을 이룬다. 희곡 연구자 윤진현 박사는 '해연'을 일컬어 "절제미와 낭만성이 돋보이는 가작(佳作)"이라고 단언했다.

함세덕 입장에서 '해연'은 중앙문단에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희곡 '낙화암', '닭과 아이들', '오월의 아침', '서글픈 재능', '심원의 삽화', '무의도 기행' 등을 줄줄이 발표했다. 또 당대 연극계의 중심 인물로 한국 연극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유치진(柳致眞)을 비롯해 문화계의 여러 인사들과 교류했다.

함세덕은 인천 출신 작가 중 문학사(史)에 비중있게 기록된 인물 중 하나다. 연구자들은 함세덕을 '서정적 리얼리즘 개척', '희곡의 언어부문에서 한국 희곡사의 발전적 토대 마련', '형식뿐 아니라 내용적 측면에서 신파극적 요소를 탈피해 한국 희곡의 근대성을 획득'한 작가로 평가한다. 이 모든 요소가 '해연'에 담겨 있다.

▲▲▲ 인천상업을 졸업하고 서울 일한서방에 근무하던 시절 함세덕. 사진 제일 왼쪽.
▲▲ 함세덕(오른쪽 두번째)이 인천상업 5학년 재학 중인 1933년 금강산을 친구들과 놀러가 찍은 사진. 당시 경험을 바탕으로 동승을 창작했다.
▲ 사진 앞줄 오른쪽이 어린 시절 함세덕이다. 사진 왼쪽부터 부친 함근욱, 조부 함선지, 숙부다.
# 동복(同腹) 남매의 사랑과 팔미도


작품 배경은 암초로 둘러싸인, 하얀 등대가 있는 서해의 작은 섬 팔미도. 극중 대사에 '일본 사람 무전 기수가 지난 봄 전장에 나갔다'는 것으로 미뤄보면 때는 중일전쟁(1937년 발발) 기간으로 추정된다. 겨울이 접어드는 10월, 고요하고 적적한 분위기가 섬과 바다에 가득하다.

극중 배경 묘사 중 '암초에 둘러싸인 섬', '섬 기슭의 깎아지른 절벽', '하얀 등대'와 같은 설명이 나온다. 지난 11일 찾은 팔미도는 함세덕이 74년 전에 그려낸 그 모습 그대로 손님을 맞았다.

'해연'의 등장인물은 등대지기와 그의 딸 진숙. 제물포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안의사(안진건)와 그의 아들 세진, 등대 잡부 윤첨지, 사공 등이다.

세진은 '몸이 약해 학괄 쉬구 절루 해변으루 요양만 댕기'는 인물이다. '떼무리(소무의도)서 천막 치구 밥해 먹는 학생'으로 '가끔 나루를 건너와선 소라 고동을 잡기두 하구, 등댈 사생하기두' 하면서 자기보다 한 살 연상의 열아홉 진숙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진숙은 인천 고등 여학교를 다니다 3학년 때 '홀아버질 돌봐디려야겠다'며 그만두고 팔미도에서 등대일을 돕는 '근대적 세련과 분방한 야성이 회합된' 여성이다.

고요한 섬에 증기선 기적 소리가 들려오고, 뎀마(傳馬船)를 타고 안의사가 팔미도에 들어오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안의사 : (명함을 내며) 바쁘신데 이렇게 찾아와서 … 안진건이라구 합니다. / 등대지기 : (돌연 얼굴에 안개가 서리며) 그럼 해안정에 있는 안의과 ….

안의사는 20년 전 등대지기의 아내를 꾀어낸 사람이다. 당시 학교 교장이었던 등대지기는 복막염 수술을 받아야 했던 아내 병원비를 공금으로 냈다가 횡령죄로 2년간 옥살이를 했다. 출옥하니 아내는 핏덩이(진숙)를 버리고 '딴 사내를 얻어' 나갔다.

그 사내가 해안정 안의과(내과) 원장이라는 사실을 등대지기는 4년 전 제물포에 '등대 주임' 사령장을 받으러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됐다. 안의사는 세진과 진숙이 사랑하는 사이라 말한다. 놀란 등대지기는 진숙을 다그친다.

등대지기 : (날카롭게) 네가 그 학생을 정말 친동생같이 사랑했다면, 어째서 그걸 나한터 감춰왔나? / 진숙 : 여쭐려고 했지만….

안의사가 떠나고 세진이 찾아온다. 진숙이 보고 싶어서, 인천항에서 당진 가는 배를 잡아 타고 온 것이다. 세진의 설득에도 등대지기는 단호하다. 세진이 떠밀려 팔미도 앞을 지나가는 배를 잡아 섬을 뜨자, 등대지기는 진숙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진숙이 '비애와 괴롬을 품고 날아가는 제비떼(해연)'를 바라본다. 그리고 막이 내려간다.

함세덕은 '해연'에서 팔미도와 진숙을 동격으로 담아낸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있어 인천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바다를 지키는 섬이다. 등대지기는 세진에게 '출생의 비밀'을 끝내 알려주지 않는다. 이 사실을 모르는 세진이 한 말을 들어보자.

세진 : 즐거울 때 외로울 때 내 눈앞에 떠오르는 건 이 섬과 등대와 푸른 바다와 자욱한 이 안개일 거에요. 그리구 그속엔 나를 보구싶어하구 걱정해주는 진숙씨가 언제든지 언제든지 저 달그림자처럼 어리구 있을거에요.

윤진현 박사는 "세진은 팔미도 공간을 인격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진숙이는 남녀의 사랑을 맺지 못했지만 결국 인천항을 지키는 등대지기 처녀로서, 인천 바다를 지켜주는 어머니로서 남게 된다"고 해석했다.

# 함세덕과 인천

함세덕은 1915년 5월 23일 인천부 화평동 455에서 태어났다. 아이 때 집에서 부르던 이름은 함성달이었다. 3남3녀 중 차남이었고, 큰형(함금성)은 이복형제였다. 부친 함근욱은 공무원으로 관립 인천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 부교관으로 공직을 시작했다.

조부 함선지는 인천신상회사 부사장까지 지낸 객주(상인)였다. 함세덕이 태어나고 얼마 뒤 부친은 근무지를 목포로 옮겼다.

함세덕이 인천이 아닌 목포에서 출생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지만 함세덕 묘비에는 강화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다. 함세덕은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목포북초)에 다녔고 열살 때 인천으로 이사해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 인천도립상업학교(인천고)를 졸업했다.

함세덕은 인천상업학교에 다니던 시절(1929~1934년) 인천부 용동으로 이사했다. 여기에서 연극, 악극을 공연하는 애관극장이 가까웠다. 새 연극이 오르면, 시험기간일지라도 반드시 애관에 갈 정도로 연극에 빠져 지냈다. 인천상업 재학시절 경험은 극작가 함세덕을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그 유명한 희곡 '동승'은 당시의 기억을 되살린 작품이다.

함세덕이 인천상업 5학년인 1933년 여름 친구들과 금강산에 캠핑 갔다가 고찰 마하연(摩訶衍)에서 본 사미승(沙彌僧)을 떠올리며 쓴 이야기다. '동승'에 나오는 지명 가좌울은 인천 가좌동에서 비롯됐다.

이밖에도 '산허구리'의 먼우금(연수구 일대), 배다리(동구 금곡동), '고목'의 소부리(우각리·창영동), 수문리(수문통·송현동) 등의 지명은 모두 인천에서 딴 것이다. '에밀레종' 등장인물 미추홀은 인천의 원초적 지명을 빌려 쓴 것이다.

인천상업을 졸업한 1934년 함세덕은 서울 본정통(충무로)에 있는 대형서점 일한서방에 취직해 1년간 일했다. 낮에 일하고 밤에 희곡을 썼다.

한국 연극계의 거두 유치진은 이때 함세덕을 알게 됐지만, 작가로서 가치를 인정하고 '제자'로 둔 건 1940년 '해연'을 발표한 뒤부터다. 함세덕은 1941년 유치진이 창립한 현대극장에 참여했다. 그는 현대극장에서 무대미술가 이원경, 배우 이해랑 등과 함께 일했다.

인천상업시절 좋아했던 해우 강홍식도 현대극장의 단원이었다. 연극인으로서 좋은 기회를 얻었지만 이때부터 함세덕의 친일 행적은 구체화된다.

함세덕은 시를 써 신문에 낸 적도 있다. 1935년 2월 동아일보에 투고한 '내 고향의 황혼'도 인천 이야기다. 당시 스물한살의 함세덕은 학교를 막 졸업하고 서울에서 극작가의 꿈을 키워가는 시기였다.

황혼이외다. / 팔미도 멀리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검은 섬 우에 / 배부른 범포(帆布) 비치며 노을 뿜은 석양이 걸렷습니다. / 항구의 불빛 멀-게 떨어져 부두의 등대가 어렴풋이 조을 때 / 기슭에 나루배가 초저녁 반작이는 샛별 아래 / 고요히 안식의 기도를 올립니다. …(이하 생략)

글 = 김명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