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여년 전 극작가 함세덕이 소무의도를 배경으로 쓴 무의도기행은 당대 대표적인 어민극으로 평가받는다. 사진은 무의도~소무의도를 잇는 연도교에서 본 소무의도 전경. /김명래기자
▲ 일러스트/박성현기자
당시 '떼무리'로 불리던 소무의도 배경
日 '중선'에 밀려난 궁핍한 삶 묘사
완성도 높고 근대 어민문학 한 획 그어
친일과 월북 행적으로 아쉬움 남겨


면적 1.22㎢의 작은 섬 소무의도는 일제강점기에 어선 40여 척이나 있던 어촌이었다. 사람들은 이 섬을 '떼무리'로 불렀다. 지금은 2.5t급 소형 어선 4~5척에 주민등록 인구 73명의 한적한 섬이다.

일제 때 떼무리에서 나온 건새우는 일본 시모노세키, 시즈오카 등지에 대량 수출되기도 했다. 인천 연안 섬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렸다.

인천이 낳은 극작가 함세덕(咸世德·1915~50)은 1941년 떼무리를 배경으로 한 '무의도 기행'을 발표했다. 조선총독부의 전시동원체제가 우리 국민 개개인의 삶을 옥죄던 때, 함세덕은 떼무리 어민들의 신산한 삶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등장인물의 대사 속에서 당시 일제의 식민지 어업 수탈 행태를 엿볼 수 있다. 극적 완성도도 우수하다. 함세덕 연구자 윤진현 박사는 "단순히 인천 앞바다의 무의도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장소적 의의를 넘어 식민지 조선의 어업 현실로부터 발원하는 한국 근대 어민문학의 한 중심을 차지하는 중대한 성과"라고 평가했다.

국내 함세덕 박사 1호인 인하대 김만수 교수(문화콘텐츠학부)도 "살아있는 구어체로, 말이 길거나 장황하지 않고, 입에 감기는 대사를 쓰는 생생한 어촌 인물을 창조했다"고 설명했다.

'무의도 기행'은 작품 제목처럼 기행문 형식이다. 극중 주인공(천명·天命)이 보통학교를 다닐 때의 담임 선생이 떼무리에 찾아갔다가 제자의 죽음을 알고 그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담임 선생을 함세덕으로 생각하고 읽을 수 있다. 그는 실제 떼무리를 찾아가 어민들을 곁에서 지켜봤을 것이다.

# 배를 타야 하는, 천명(天命)

'무의도 기행'은 '도민(島民)들이 가장 기피하는 황량한 겨울이 접어들려는 시월 상순'에 '서해안에 면한 무의도(떼무리라고 부른다)라는 조그만 섬'에서 시작된다. '이번에 수원가는 철로가 생겼다'는 말로 미뤄보면 수인선 개통 시기인 1937년으로 추정된다.

섬사람들은 1년 중 겨울에 막 접어드는 10월 이 무렵을 싫어했다. '성해가 끼믄 민어낚시 하든 것두 못 해먹게' 되고 '한겨울 굶구 들어 앉었을'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배경은 소무의도(떼무리)다.

지금도 영종·용유 사람들은 이곳을 떼무리라고 부른다. 떼무리와 큰떼무리(무의도) 사이를 나룻배가 오갔는데, 2년 전 두 섬을 잇는 연도교가 완공됐다.

등장인물로 주인공 천명(天命)과 그의 부모인 낙경, 공씨, 천명의 외삼촌으로 선주인 공주학 등이 나온다.

낙경은 강원도에서 집과 땅을 팔고 떼무리에 건너와 정착한 인물이다. 떼무리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렸다.

지난 18일 소무의도에서 만난 강기인(80)씨는 "해방 무렵에 120~130호가 작은 마을에 빽빽하게 들어섰다"고 말했다.

낙경이 떼무리에 오면서 '연평 가서 조기만 잡으문, 돈 벌긴 물 묻은 손에 모래 줍기'라고 생각했다. 한때 새우장군, 조기장군으로 '떼무리 정낙경'이 인천 앞바다뿐 아니라 서해에서 명성을 날렸다. '앰평에 천명 아버지가 쓱 내리문 계집이란 계집은 다 몰려왔고' '(낙경은) 주머니에서 돈을 푹푹 집어줬을' 정도였다.

낙경과 같이 배를 타던 동사들 모두 잘 풀렸다. 정첨지는 싸전을 내고 돈놀이를 하고, 황서방은 강화에 비단전을 냈다. 칠성할아버지는 먼우금(연수구)에 땅을 샀는데 수인선 개발로 평당 6전 주고 산 땅이 25전으로 4배 이상 올라 큰 돈을 벌었다.

천명은 낙경의 셋째 아들이다. 천명의 큰형은 조기를 잡다가, 둘째형은 새우 사리 나갔다가 죽었다. 어머니 공씨는 '비나 억수 같이 퍼붓구 높새에 부엌 문작이 덜그덕거리기나' 하는 날이면 아들 생각에 밤새 운다. 낙경의 처남, 공씨의 남동생인 공주학은 천명을 동어(숭어)잡이에 내보내려 하지만 천명은 거부한다.

아들을 걱정하는 낙경과 공씨를, 내년에 발동선을 사 천명이를 일등 기관사로 키우겠다며 설득한다. 이 대목에서 일제 때 인천 섬 지역 어선의 변화상을 알 수 있다.

극중 낙경이 과거 타던 배는 풍선(風船)이었다. 낙경에게 뱃일을 배운 공씨는 일본에서 제작된 중선(일명 나가사키선)으로 고기를 잡았고, 중선은 1940년대 동력선으로 교체됐다.

공주학 소유 중선이 부자리(배 밑바닥)가 헐었다는 말을 사공에게 전해 들은 천명은 부엌에 들어가 도마칼을 들고 나와 '물에서 죽나 여기서 죽나, 죽긴 마찬가지'라면서 배를 타느니 당장 죽겠다고 발악하면서 버티지만, 결국 외삼촌의 배에 오르게 된다. 천명은 어떻게 됐을까.

자신의 이름처럼 바다에서 죽는 게 타고난 운명이었을까. 그는 낡은 배와 함께 바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막이 내리기 전 내레이션이 흐른다.

나는 이 서글푼 이야기를 고만 쓰기로 하겠다. …(중략)…천명의 집을 찾어가니, 공씨는 얼빠진 사람같이 부엌에서 멀건이 바다만 내다보고 있었다. 나를 보드니 달려와 손을 꼭 붙들고 "선생님 그렇게 나가기 싫다는 눔을, 그렇게 나가기 싫다는 눔을…"할 뿐, 말끝을 잇지 못하고 울기만 하였었다. 천명은 그가 6학년 때 내가 가르키든 아해(兒孩)였다.

▲ 끝이 뾰족하고 돛이 여러개 달린 중선배는 1930년대 우리나라 어민들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일본 나가사키 지역에서 제작돼 나가사키선 또는 일중선이라고 불렸다. 출처='풍경, 함세덕'(윤진현 지음, 다인아트)
# 일제의 어업 침탈, 궁핍한 어민의 삶

함세덕은 일제 강점기 소무의도를 우리 어촌의 풍경과 어민의 삶을 드러내는 전형적 공간으로 선택했다. '참 중선이란 사내 노름이지', '안될랴문 조상 산솔 팔아넣구두 빈손 싹싹 비비지만, 걸리는 날이믄 몇만원 잡긴 상치쌈에 식은 밥이지'란 대사에서 고기잡이를 대하는 당시 어민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서해는 선진 기술로 무장한 일본 어선이 점령하다시피 했다. 각종 기록을 종합해 보면, 1930년대 일본 어민의 1인당 어획고는 254원으로 조선 어민(73원)보다 크게 높았다. 또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어업조합을 철저하게 감독하며 고기를 잡아 유통하는 전 과정을 장악했다.

서해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정낙경이 몰락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전북 군산, 평남 남포에서 인천 앞바다까지 온 중선(나가사키선)에 밀려 고기잡이를 그만두게 된다.

또 정낙경은 '괴기만 잘 잡었으믄 그만이지'란 생각에 젖어 있었을 뿐 어획물을 입찰·경매하는 방식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낙경의 처남 공주학은 중선과 그물을 장만했지만 낡은 배를 제때 수리하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결국 훗날 발동선을 사 선장을 시키겠다던, 조카(천명)를 바다에서 잃게 된다.

▲ 망우리공원에 있는 함세덕의 묘비 뒷면에 "1950년 6월 29일 서울에서 ○사했다"고 써 있다. ○의 글자는 누군가 긁어 지웠다. /김명래기자
# 친일과 월북, 인간 함세덕


무의도기행 발표 당시 함세덕은 현대극장 산하 국민연극연구소 교무과장이었다. 현대극장 배우를 관리하고, 극단이 무대에 올릴 극을 쓰는 작가 역할을 겸했다 한다.

일제의 마지막 발악이 한창이던 1943년 함세덕은 무의도 기행을 '황해'라는 제목으로 개작해 제2회 국민연극 경연대회에 참가했다.

당시 함세덕은 '성전 완수', '추악한 미영(美英)의 격멸'을 이야기했다. 해방 뒤 함세덕은 좌익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고, 1947년 동승을 책으로 낼 때에 서문에 "결과에 있어서는 조선문화의 정한 발전에 역행적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하게 되었다"는 '친일 반성문'을 쓴다.

1947년 무렵 월북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뒤인 1950년 6월 29일 전쟁 통에 다쳐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복강내출혈로 수술 도중 사망한다.

사망 일자가 6월 27일, 6월 30일이라는 기록도 있다. 유가족들은 함세덕을 장춘단 뒷산 임시묘지에 묻었고, 1954년 6월 1일에 망우리로 이장한다. 지난 11일 찾은 망우리의 함세덕 묘. 109506이란 묘지번호가 선명했다. 그의 부모, 동생(함성덕) 옆에 안치돼 있다.

죽산 조봉암 묘역 앞에 난 산책로에 있는 '동원천 입구 표지판'에서 산 아래쪽으로 1~2분 정도 가면 그의 묘를 찾을 수 있다. 비석 뒷면에 쓰인 구절이 참 인상적이다.

삶은 누군가의 손을 붙잡는 일이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다.

글 = 김명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