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군 사진병 돈 오브라이언(Don Obrien)이 해방 이후 1945년 10월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LST함(전차상륙함)을 타고 인천항으로 들어오기 직전 찍은 사진.
지배·억압 '인천항' 현실 고스란히
일부 미군들 만행 하소연도 못해
현재 주한미군 사건사고의 출발점

'詩쓰기란 사회와 싸움' 분노 표출
기자시절 반감 키우다 체포되기도

종로에 서점 '마리서사' 문 열어
조병화 등 문인들 사랑방 역할
목마와 숙녀·세월이 가면 등 남겨


해방 직후 인천항의 비극을 담은 박인환(朴寅煥·1926~1956·사진)의 시 '인천항'. 1947년 4월 월간지 '신조선'을 통해 발표한 이 작품엔 미군정 깃발 아래 자행된 미군의 횡포와 모리배가 판쳤던 인천항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인환은 힘 없는 민족의 아픔이 서린 장소가 인천항이었음을 기억했다.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 서정적인 시로 유명하지만, 사실 현실인식이 아주 강했던 시인이다. 그의 초창기 작품들은 대부분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이 제국주의 침략에 고통받고 있는 사실을 분개하는 내용이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박인환은 도시적 서정주의 특색이 드러나는 작품을 발표하고 영화 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한다.

박인환 평전을 쓴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는 "문학이 사회문제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던 1960~70년대 '참여문학'을 박인환은 1940년대부터 앞장섰다고 보면 된다"며 "'인천항'은 '서양과 동양', '백인과 흑인', '문명과 미개' 등으로 이분화된 서양 중심의 근대성을 타파하려는 그의 현실 인식이 녹아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 인천항, 가난한 조선의 프로필

박인환은 1955년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 '박인환 선시집' 후기를 통해 '시 쓰기란 사회와의 싸움'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나는 10여 년 동안 시를 써 왔다.…(중략)…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었다. 나는 지도자도 아니며 정치가도 아닌 것을 잘 알면서 사회와 싸웠다…"고 했다.

박인환은 해방 당시 우리나라를 지배·억압하고 있던 미군에 대한 분노를 '인천항'이란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밤이 가까울수록/성조기가 퍼덕이는 숙사와/주둔소의 네온사인은 붉고/정크의 불빛은 푸르며/마치 유니언잭이 날리던 식민지 향항(香港·홍콩)의 야경을 닮아간다//조선의 해항 인천의 부두가/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상해의 밤을 소리없이 닮아간다

인천항 곳곳에 펄럭이는 성조기. 그들은 조선인을 구하러 온 해방군이 아니라 또다른 외세였다.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상륙한 미군은 행정권과 치안권을 장악하고, 일본인이 남겨둔 재산을 몰수했다. 항만도시 인천의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천항마저 미군이 점령해버렸다.

인천항만 시설의 노란자위라 할 수 있는 인천선거(도크)를 해방후 미군이 점령하여 독점 사용중인 까닭에 항만도시로서의 인천부는 지금 거의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중략)… 이에 대하여 인천항만 관계측은 선거사용을 우리에게 일부라도 개방치 않으면 중부조선의 사업은 쇠잔하여지고 민생문제에도 큰 불안을 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대중일보 1947년 3월7일자)

미군이 인천항을 점령해 버리면서 까다롭고 복잡한 수속절차 등을 이유로 선박의 움직임이 둔화됐다. 항만 노동자들은 일감을 잃어버렸고, 항도(港都) 인천은 쇠퇴해 갔다.

죄 없는 시민들은 일부 몰지각한 미군의 만행에 하소연 한 번 못하고 당했다. 1947년 1월 11일 새벽 1시 인천 옥련동의 한 가정집에 미군 헌병 3명이 몰래 들어가 아이들 곁에서 잠을 자던 한 부인을 총으로 위협하고 겁탈한 사건이 대중일보에 실린다.

이 사건은 인천시민에 대한 미군의 횡포를 보여준 단적인 예였다.
미군들은 조선인 경찰의 범인체포를 방해하거나 부대 인근에 살던 죄 없는 시민들을 총으로 쏘기도 했다.

미군의 풍기문제는 사회적 이슈가 됐고, 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신문지상에 자주 등장했다. 효순이 미선이의 생명을 앗아가 버린 미군 장갑차 사건(2002년 6월 13일)을 비롯해 요새 심심하면 터져나오는 주한미군의 성추행 사건이나 음주뺑소니, 폭행 등 각종 사건들은 이미 70여 년 전 인천에서 시작된 비극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쫓겨나는 신세가 된 일본인들은 도리어 미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귀국길에 오르기도 했다.

인천 출신 일본인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는 '인천철수지'(1948)에서 "군정청의 프라친스키 중위는 처음부터 일본인 편에서 마지막까지 우리를 특별 배려해 준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사람이었다"며 "그는 조선인이나 중국인을 다루는 태도와 일본인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 일본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고, 개인적인 편의를 제공받은 사람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박인환은 이 같은 미군의 모습을 보면서 미군정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박인환은 1949년 7월경 자유신문 기자로 활동할 당시 동료기자 4명과 함께 남로당에 가입했다는 혐의로 내무부 치안국에 체포되기도 했다.

인천항은 미군이 첫 발을 내디딘 곳이기도 했지만, 중국, 일본 등지에 있는 동포들이 귀환한 곳이기도 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해방직후 귀환 해외동포는 250만 명에 달했고, 이중 75만명 가량이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귀환동포들이 가난과 질병에 맞서 싸우는 동안 서울에서 돈 보따리를 둘러메고 온 모리배는 인천시민들을 농락했다. 이들의 대표적인 수법은 쌀값 조작과 일본인이 남겨두고 간 적산가옥·공장 매점, 고리대부, 밀수였다.

고향에 돌아가도 농사지을 땅이 없던 귀환동포들은 인천에 머물며 일본인 소유 여관을 개조한 수용소에서 지내야 했다. 미군정은 일본인 가옥을 저렴한 가격에 임대하려 했지만, 모리배들이 이미 일본인으로부터 집을 사들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12일자 사설을 통해 모리배들을 "동포의 이익을 약탈함으로써 자가(自家)의 번영을 추구하는 죄과를 그대들은 아는가 모르는가"라고 비판한다.

박인환은 귀환동포들의 설움이 담긴 봇짐과 모리배들의 돈 보따리를 대비시키면서 인천항의 모순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해외에서 동포들이 고국을 찾아올때/그들이 처음 상륙한 곳이/인천항구이다//그러나 날이 갈수록/은주(술)와 아편과 호콩(땅콩)이 밀선에 실려오고…//(중략)서울에서 모여든 모리배는/중국서온 헐벗은 동포의 보따리 같이/화폐의 큰 뭉치를 등지고/황혼의 부두를 방황했다

이처럼 인천항은 조선의 가난을 대변했다. 박인환이 목격한 인천항은 영국이 지배했던 홍콩 식민항이나 중일전쟁 당시 일본에 짓밟혔던 상해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인천항 미군 막사에 펄럭이는 성조기와 화려한 네온사인을 본 박인환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박인환은 1949년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등과 함께 발간한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인천항'을 다시 싣는다.

그리고 서문에서 "나는 불모의 문명 자본과 사상의 불균정한 싸움 속에서 시민정신에 이반된 언어작용만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며 "자본의 군대가 진주한 시가지는 지금은 증오와 안개 낀 현실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 1947년 3월 박인환(오른쪽)이 문우 임호권과 함께 마리서사 앞에서 찍은 사진.
# 박인환과 마리서사


박인환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가 스무살 무렵 종로에 세운 서점 '마리서사'다.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난 박인환은 초등학교 시절 서울로 이사했다. 1944년 부모님의 뜻에 따라 평양의전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자퇴하고, 1945년 말 아버지에게 3만원, 이모에게 2만원을 빌려 지금의 파고다공원 인근 낙원동에 고서점을 열었다.

마리서사라는 이름은 그가 존경한다는 프랑스 출신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과 책방을 뜻하는 서사(書舍)를 합친 것이다.

마리서사는 당시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인천의 시인 조병화, 배인철 등도 이곳을 제 집 같이 드나들며 문학과 인생을 이야기했다. 결국 책장사는 뒷전이 돼 버리고 1948년 봄 마리서사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만다. 이후 박인환은 자유신문 기자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때 경향신문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종전 뒤 다시 찾은 명동에서 그는 짧은 문학생활을 불태웠다. 미국을 여행하면서 기행문을 남겼고, 미국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시에 녹였다. 박인환은 외국 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의 대표작 '목마와 숙녀'에는 영국의 유명 소설가 버지니어 울프(1882~1941)가 등장한다.

박인환은 1956년 3월 20일 오후 9시께 술을 마신 뒤 짜장면 한 그릇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심장마비로 돌연 사망했다. 명동의 한 주점에서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라는 명시 '세월이 가면'을 남긴 지 얼마 안 된 때다.

박인환이 그렇게도 가난하게,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그 해에 불우한 천재화가 이중섭도 세상을 등졌다. 그 이듬해에는 '사슴 시인' 노천명이 저세상으로 갔다.

박인환과 가깝게 지냈던 조병화는 "시를 쓰는 것만이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인생이요 인생은 잡지의 표지처럼 쓸쓸한 것도 아닌 것, 외로운 것도 아닌 것, 이렇게 너는 말을 했다. 너는 누구보다도 멋있게 살고 멋있는 시를 쓰고 언제나 어린애와 같은 흥분 속에서 인생을 지내왔다"는 내용의 조시(弔詩)를 바쳤다.

글 = 김민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