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 고유섭(1905~1944)은 만 서른아홉의 길지 않은 삶에 우리 근대 미술사학계에 큰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미술사학계의 거목인 수묵 진홍섭,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동국대 총장을 지낸 초우 황수영이 우현을 사사했다. '박물관이 나의 무덤'이라고 말하고, 국립중앙박물관장 재직 중에 세상을 떠난 혜곡 최순우 역시 고유섭의 제자였다. 우현을 알지 못하고 미술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다.

우현은 1933년 개성박물관장에 취임한 뒤 간경화로 숨을 거둘 때까지 약 10년 동안을 조선 미술의 특징을 찾는 일에 몰두했다. 조선 미술사를 쓰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그의 학문적 열정은 문학에도 맞닿아 있었다. 우현은 1941년 일기에서 "후세에 남을 것은 가장 예술적인 작품뿐이다. (중략) 가장 널리 남을 수 있는 것은 문학이다"고 적었다.

실제 우현의 글은 군더더기 없는 유려한 필치다. 문학적 표현으로 더욱 빛나는 '문화답사기'였다. 그가 문무대왕릉의 존재를 언급한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1939년)는 문학자들 사이에서도 명문으로 꼽힌다.

우현 고유섭은 인천이 배출해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 미술사학자이자 문인이었다. 그가 자신의 학문적 자양분과 문학적 자질을 고향 인천에서 익혔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하기 전까지 약 26년간 우현이 남긴 시와 산문 여러 편에 담긴 1920년대 인천의 풍경은 역사적 기록으로 가치가 충분할 뿐 아니라, 문학 활동을 통해 학문의 큰 줄기를 잡은 우현의 출발점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인하대 최원식 교수는 "우현의 문학적 충동과 학문적 충동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우현의 문학 작품이 아직껏 본격적인 연구 대상이 된 적이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문학계에서 우현이 남긴 글을 학문적 과제로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문학적 기록은 '우현 고유섭 전집 9권'(열화당·3만2천원)에서 읽을 수 있다. 옥련동에 있는 인천시립박물관에 가면 우현의 자취를 엿볼 수 있다.

/김명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