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살던 유년시절 기억 소설에 녹여
중구 중앙동 1가 19번지 일대 배경
열두살 어린아이 '나' 관점으로 표현

친구들과 석탄 훔치던 현장부터
청·일 조계지 경계·자유공원 등 찾아
서민들 애환 서린 차아니타운
글쓰기 동력이자 작가 꿈꾸게 한 곳


'중국인 거리'의 작가 오정희(67)를 그 '중국인 거리'에서 만났다.

지난 4일 오후 3시30분께 인천역. '중국인 거리'를 꽉 쥔 두 손에서는 땀이 배어났다.

전후(戰後) 인천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린 대표적 작가와

그 작품의 배경 장소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은 극한까지 치달았다.

더욱이 몇 차례나 인터뷰 요청을 거절당한 터였다.

"중국인 거리를 쓴지 30년이 넘게 지났어요. 이제 인터뷰는 하지 않으려고 해요."

딸 같은 여기자의 집요한 요청 때문이었을까. 어렵사리 인터뷰를 허락했다.

'중국인 거리'를 같이 답사하자는 바람까지 성사됐다. 1950년대 후반의 인천 차이나타운 일대를 그림처럼 묘사한 '중국인 거리'를 작가와 함께 걸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만큼 손에 땀을 쥐는 것은 당연지사.

인천역에 모습을 드러낸 오정희는 단아한 기품이 넘쳤다. 한눈에 그가 오정희임을 알아차리게 했다.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몇 장면을 가지고 모자이크 하듯 쓴 소설이에요. 기억이 맞는지 아닌지 의심하거나 하지 않았어요. 상상력이 제한될까봐 (중국인 거리를 쓸 때) 일부러 차이나타운을 찾지도 않았어요. 그러다 50세가 넘어 비로소 이곳에 와 봤어요. 예전 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 놀랐어요."

드디어 화차가 오고 몇 번의 덜컹거림으로 완전히 숨을 놓으면 우리들은 재빨리 바퀴 사이로 기어들어가 석탄가루를 훑고 이가 물어진 문짝 틈에 갈퀴처럼 팔을 들이밀어 조개탄을 후벼 내었다. (중략) 선창의 간이 음식점 문을 밀고 들어가 구석자리의 테이블을 와글와글 점거하고 앉으면 그날의 노획량에 따라 가락국수, 만두, 찐빵 등이 날라져 왔다. (중략) 어쨌든 석탄이 선창 주변에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있는 현금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고, 때문에 우리 동네 아이들은 사철 검정 강아지였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석탄을 훔치던 바로 그 현장에 선 오정희는 60여년의 세월을 단번에 건너 뛰었다. 당시 그대로라는 철로가 타임머신 역할을 훌륭히 했다.

오정희는 1955년 조양석유(주) 인천출장소 소장으로 취직한 아버지를 따라 충남 홍성에서 인천으로 이사했다. 신흥국민학교 2학년으로 전학해 5학년을 마칠 때까지 약 4년간 인천에 살았다.

"인천에서는 세 번 이사했는데, '중국인 거리'는 마지막에 살았던 인천 중구 중앙동 1가 19번지 일대를 배경으로 삼아 쓴 것이에요. 소설 얼개는 봤던 것, 들었던 것으로 짰어요. 12살 어린아이 '나'의 눈으로 가감없이 당시 모습을 쓰고자 했어요."

오정희가 살았던 1가 19번지 집은 대불호텔 터 바로 맞은편으로 지금은 '포그시티(POG CITY)'라는 카페가 됐다. 이곳은 '중국인 거리' 속 '나'가 살던 집이다.

여기서 스무 걸음 쯤 떨어진 곳에 소설에 나오는 중국인 주인의 푸줏간(현재 청화원)이 있다. 자유공원으로 이어지던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도 그대로다. 다만 지금처럼 큰 건물이 여럿이지 않았고, 반듯한 보도블록 대신 돌멩이가 섞인 흙 길이었다.

"당시 인천은 전쟁으로 부서진 건물을 손보고 새로 건물을 짓느라 분주했어요. 해인초(해초)를 끓여 벽에 칠했는데 그 냄새가 무척 독했어요. 동네 가득 풍기는 해인초 냄새, 바다에서 불어오는 짠 바람, 거기에 실려오는 석탄가루, 흔하게 볼 수 있는 중국인과 미군들. 인천은 신기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빛깔의 도시였어요. 소설에 그 느낌을 모두 담았지요."

살던 곳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끗한 뒤 오정희가 말을 이었다. 9살 때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보다시피 우리집은 중국인 거리의 시작점, 그러니까 일본인 거리 끝자락에 있어요. 집 위쪽의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옆에는 일본식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요. 소설 속 메기언니 같은 양공주들은 그 쪽에 세들어 살았어요. 내가 생각한 메기언니 집, 그러니까 친구 치옥이 집 외관은 이 집과 비슷해요."

오정희가 가리킨 집은 대불호텔 터와 나란히 붙은 회색 이층집이었다. 폭이 좁은 베란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소설 속 그 집이 눈앞에 다가왔다.

'중국인 거리'에 등장하는 '나'는 어린 나이에 전쟁과 피난 생활을 겪고, 가난 속에 늘어만 가는 동생들로 부담을 느낀다.

친구 '치옥이'는 부모의 관심과 애정이 결핍된 상태로 자라며 위층에 세들어 사는 메기언니의 화려한 미제 물건에 빠져 '양공주가 될꺼야'라고 말하고는 한다. 국제결혼을 꿈꾸며 흑인 군인과 살림을 차린 '메기언니'는 술 취한 그 군인이 2층에서 내던지는 바람에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메기언니가 또다른 백인 사이에서 낳은 딸 '제니'는 고아원에 맡겨진다. 이후 치옥이도 공장에서 사고로 다리를 잃은 아버지, 계모에게 버림받아 학교를 그만 두고 동네 미용실에 맡겨진다.

"딱 누구를 모델로 삼아 탄생시킨 캐릭터들은 아니에요. 당시 내 주변에는 수많은 나, 치옥이, 메기언니, 제니가 있었어요. 캐릭터를 둘러싼 에피소드는 내 경험과 상상이 어우러져 만든 것이지만, 있었던 일, 없었던 일로 나눌 수 없어요. 실제 사건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요. 문제의식을 가지고 쓴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역사 속 한 장면이 됐어요. 부끄럽고 불편한 역사지만, 사실이라면 받아들여야 하지요."

오정희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틀리지는 않았다. 월미도에 미군이 주둔했던 한국전쟁 직후 중구 관동 적산가옥에는 그 미군들과 살림을 차린 양공주들이 모여 살았다.

1951년, 이 동네로 이사왔다는 김막내(84) 할머니의 기억도 오정희와 같다. "양공주들은 언제든 떠날 사람들로 보였어. 거의 대부분 세살이를 했고, 살림은 임시로 차린 듯 싶었고. 중구청 옆 언덕의 2층 집에도 양공주가 여럿 살았지. 주말이면 양공주들을 찾아 나온 미군들이 동네에 몰렸어. 알 수 없는 말로 싸우며 시끄러운 밤도 많았고. 양공주들이 짐을 싸 떠나면, 국제결혼이 이뤄졌거나 이사를 갔나보다 생각했어."

'나'가 뛰놀던 자유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월미도 옆 바다가 훤히 보이는 조망대에 도착했을 때 오정희는 망설임 없이 난간에 올랐다. "그때는 바다가 훨씬 더 가까웠는데…." 이곳에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보면 종소리가 꽤나 가깝게 들리곤 했단다.

"모두 성당 종소리라고 생각했어요.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성당이 있었던 것 같아요. 고아원을 운영하는 성당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어렴풋이 나요. 학교를 가면 한 학년에 10%쯤은 고아원에 사는 아이들이었어요. 버려진, 어린 혼혈아이들도 고아원으로 몰렸던 때예요."

50년 넘게 덕적도, 동구, 부평구 등지에서 고아원을 운영한 서재송(86)씨의 기억과 '중국인 거리'에서 제니가 맡겨진 고아원을 맞춰보면 그 고아원이 딸린 성당은 답동성당이다.

"1950년대 말 중구에서는 답동성당이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어. 월미도에 미군, 양공주 가정집이 내동에 몰려 있었기에 답동성당 고아원 쪽에도 꽤나 많은 혼혈 고아들이 맡겨진 것으로 기억해. 나중에는 동두천, 의정부, 평택, 군산 등 미군 부대가 진을 친 타도시에서 태어난 혼혈 고아들도 인천으로 보내지고는 했지. 그 도시들에는 임시보호소밖에 없던 탓이지."

한국전쟁 중심에 있었던 인천은 미군들이 휘젓는 공간이 되고, 수많은 이의 삶이 치옥이, 메기언니, 제니와 같은 불행으로 이어지고는 했다. 어린 오정희의 눈에 비친 그들의 삶은 '중국인 거리' 속에 박제처럼 생생하다.

"유년기에서 청소년기로 넘어가는 그 중요한 시기를 차이나타운에서 보낼 수 있었음에 감사해요. 스스로 아이도, 어른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성장의 공포를 느낀 예민한 그때 낯설면서도 신기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차이나타운은 나에게 많은 자극을 줬어요. 또 작가라는 꿈을 꾸게 했고, 글쓰기 동력이 됐어요."

자유공원을 내려오면서, 오정희가 2004년에 시작한 뒤 아직까지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는 소설 '목련꽃 피는 날'에 대해 물었다. 이 소설 역시 인천 차이나 타운을 배경으로 한다. "제2의 중국인 거리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고 하자, 오정희는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슷한 생각으로 시작한 글이에요. 오래 멈춘 채로 남겨둬 마음에 숙제로 남은, 그래서 늘 찜찜한 생각에 뒷맛이 개운칠 않아요. 언젠가는 완성해야 하겠지요."

어느덧 다시 인천역이다. 헤어질 시간이다. 역 뒤에선 '나'와 친구들이 멈춰선 화차의 석탄가루를 훔치러 들락였던 철길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축항선'이라 불리는 이 철길은 지금도 살아있다.

"철길은 예전 그대로예요. 지금은 석탄을 훔쳐 먹거리로 바꿔 먹는 사철 검정 강아지 같은 아이들은 없지만요.(웃음) 지켜야 할 옛 것은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한 차이나타운이었음 좋겠어요."

글 = 박석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