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태생… 해방이후 김차영과 함께 동인회 만들어 활동
문인협 인천지부위원장 등 맡아 지역 문화계 이끌어
연작시 6편 '인천찬가' 등 애향심 가득 "역사학자 이상으로 해박"

1987년 美 LA로 떠난 뒤 생애마감 한달전 돌아와 문인들 만나
"모두 버리고 가는 것 같아 가슴아파" 이민직전 인터뷰 직접 스크랩


인천의 대표 향토시인 한상억(韓相億·1915~1992)은 인천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일생을 바친 시인이었다.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국민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사가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그는 천생 '인천시인'이다.

1915년 9월 1일 강화 양도면에서 태어난 한상억은 1930년 길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인천공립상업고에 진학했다.

해방이후 동향 시인 김차영과 함께 '시와 산문' 동인회를 만들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들어갔다.

1951년 한국문인협회 인천지부 위원장을 시작으로 문총 인천지부 위원장(1961), 한국예총 경기지부장(1963) 등 인천 문화계에서 주된 역할을 맡았다.

한상억이 생전에 발표한 시집 2권 '平行線의 對決(평행선의 대결·1961)'과 '窓邊思惟(창변사유·1976)', 그리고 유고시집 '그리운 금강산(1993)'엔 그의 인천사랑이 듬뿍 담겨 있다.

특히 '仁川讚歌(인천찬가)'라는 제목이 붙은 연작시 6편이야말로 그를 왜 인천시인이라 부르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천찬가'는 첫 번째 '파도의 노래'에서 시작해 '싸리재의 노래' '월미도의 노래' '송도의 노래' '신포동의 노래' '문학산의 노래'로 이어진다.

싸리, 싸리재/구름 무심히 넘던/싸리재 고개/수건 쓰고 고개 숙인/방앗간 아가씨/한숨이 넘던 고개//솔가래 한동 팔아/동태 한마리/지게다리에 매달고//취해 넘던 긴담 모퉁이/싸리꽃 하늘거리던 언덕을/高層建物(고층건물)이 내려 누르고/세상은 많이도 변했는데/黃海(황해)의 鄕愁(향수)만은/潮水(조수)처럼 밀려 넘는 고개…(이하 생략)

한상억이 제2시집 '창변사유'에 남긴 '인천찬가 2편'인 '싸리재의 노래'. 과거 1960~70년대 인천 중심가 중 하나였던 싸리재는 애관극장, 신신예식장, 인천기독병원을 중심으로 양복점과 가구점, 약국 등이 줄지어 있어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한상억이 고향 강화를 떠나 1960년대까지 살았던 곳이 바로 싸리재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신포동과 배다리로 이어지는 길을 다니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 가는 싸리재를 시에 담았다.

지난 8일 오후 한상억이 살았던 율목동 231번지를 찾았다. 지금 옛 집은 사라졌지만, 서로 맞닿아 있는 인천기독병원과 인천성산교회 사이다. 싸리재는 한상억을 기억하고 있을까. 한상억이 장로 안수를 받았다는 성산교회에서 최상용 담임목사를 만났다.

최 목사는 1980년대 부목사로 있을 때 교역자와 성도 관계로 한상억을 만났다고 한다. 최 목사는 한상억을 시인이면서 '신앙인'으로, 또 '인천 역사가'로 기억했다.

최 목사는 "인천역사에 대해선 역사학자 이상으로 해박한 분이었다"며 "노인대학 어르신들을 모시고 강화의 역사 유적지로 갈 때면 늘 동행해 설명하셨다. 아마 지금의 역사해설가보다 더 뛰어나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목양실을 나와 싸리재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산교회 주차건물 옥상에서 인천을 감상했다. 월미도 너머로 인천항 부두 크레인과 인천대교가 어렴풋이 보였다. 한상억도 아마 여기 어딘가에서 월미도와 서해바다를 보면서 감상에 젖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천 이야기'를 시로 표현했으리라.

해가 솟는 아침/별이 뜨는 밤/노래 소리/물결 소리/끊이지 않는/너는 오랜 歲月(세월) 지금도/港口(항구)의 感覺(감각)/그리고 鄕愁(향수)…(중략)…/너의 발자취/하나, 둘,/차라리 뼈저린 歷史(역사)/누가 여기를 다녀 갔기에/누가 여기서 말씀했기에/누가 여기서 노래했기에/지금은 사라진/潮湯(조탕), 龍宮閣(용궁각)의 幻影(환영)…(생략)

'월미도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은 '인천찬가 3편'이다.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사라져가는 '옛날 것'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으로 1976년 12월 5일 한국문인협회 경기지부(인천 중구 신생동)에서 발행한 '경기문예' 창간호에 실렸다. 70여 편의 작품 중 첫 번째로 수록돼 그야말로 '경기문예' 창간호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한상억이 인천시와 지역 문단에서 보인 왕성한 활동은 유명하지만, 강화 유년기와 미국에서 보낸 말년의 생활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난 9일 시인 한상억 인생의 밑거름이 된 유년생활을 알아보기 위해 강화 양도면 도장2리 대흥마을에 갔다.

마을 이장 고두관(65) 씨의 소개로 한상억을 알고 있다는 토박이 구영회(68) 씨를 만났다. 구씨의 외삼촌이 한상억과 길상보통학교를 함께 다녔고, 그의 어머니는 한상억의 부인 이호숙(1915~1997) 씨와 자매처럼 지냈다고 한다. 구 씨는 한상억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구 씨는 "아저씨가 길상보통학교에서 성적 1, 2등을 다퉜다고 해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인천상고를 떨어졌는데, 당시 길상학교 교장이 인천상고 교장한테 '한상억이 입학 못하면 우리 학교 문 닫아야 한다'고 애걸복걸 해서 입학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어머니에게 들었어요"라고 한상억의 학창시절에 얽힌 에피소드도 소개했다. 그는 한상억의 예명이 '대남'이었음을 알려주기도 했다.

구 씨와 함께 찾아간 한상억의 생가터. 지금은 옛 초가집이 헐리고 2층 양옥집이 들어섰다. 한상억 생가는 정남향으로 있었다고 한다. 마루에 걸터 앉으면 바로 앞 논밭 너머로 마니산 풍경이 펼쳐지는 자리였다. 제1시집 평행선의 대결엔 '마니산'을 비롯해 '삼랑성 동문', '보문암' 등 강화를 그린 작품이 여러 개 있다.

"맑게 갠 開天節(개천절)의 오후/피크니크를 나온 서울 사람들의/츄잉껌 종이가 산길에 散亂(산란)해도/五千年(오천년)이라던가 寂寞(적막)의 터전/여기는 都會(도회)의 公園(공원)이 아니다/都會(도회)와 바다는 내가 지나온 人生(인생)의 市場(시장)…" ('마니산' 중에서)

이날 강화 해안도로를 따라 동막해수욕장을 거쳐 들른 마니산엔 피서철과 주말을 맞아 등산객으로 붐볐다. 인파를 뒤로하고 강화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마니산은 관광지의 어수선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고요함 그 자체였다. 5천 년 역사의 시작을 알린 마니산의 기운이 강화 곳곳에 뻗치고 있는 듯했다.

한상억은 1987년 10월 10일, 아들 충희 씨가 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떠났다. 부인과 함께 아들 집 인근 노인요양 아파트에서 지냈다. 2명의 어린 손녀(미경, 미선)를 보는 게 하루의 낙이었다고 한다.

1992년 가을 한상억은 숨을 거두기 한 달 전 인천을 찾아 그동안 못 만났던 인천 문인들을 만나고 돌아갔다. 그리운 금강산 작곡가 최영섭도 만났다.

최영섭 작곡가는 "마지막이란 걸 직감하셨는지 당시 고국을 방문했을 때 설악산이며 경주, 제주도, 한려수도, 강화도 등 전국을 둘러보시곤 기력이 다해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던 기억이 난다"며 "그러고 나서 얼마 뒤 미국에서 돌아가셨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고 회상했다.

한상억은 그해 11월 7일 할리우드 프레스비터리언 병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상억의 임종은 며느리 김정애(62)씨가 지켰다. 그가 병원에서 즐겨 들었던 노래는 찬송가 '본향가는 길'과 요단강 건너 만나리라는 가사로 유명한 '해보다 더 밝은 천국'이었다.

충희 씨는 "아버지에 대해 존경하는 부분은 인천에 대해 애착을 갖고 문화산업의 기초를 닦기 위해 노력하셨던 점이다"라며 "인천을 위해 희생하셨다고나 할까. 굉장히 인천을 좋아하신 분이셨던 것은 확실하다"라고 말했다.

한상억의 묘지는 미국에 있지만, 그가 남긴 노래와 시는 책으로 시비로 인천지역 곳곳에 남았다. 지난 7월에는 고향 강화 양도면에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한상억의 유품과 유작은 부인 이씨가 정리해 미국 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하고, 유고시집 출판을 위해 인천문협 등에 전달해 지금은 충희 씨 집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충희 씨는 최근 몇 차례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를 계기로 유품과 사진을 정리하던 중 아버지가 스크랩해 놓은 1987년 10월 3일자 경인일보 인터뷰 기사를 발견했다고 지난 10일 알려왔다. 미국으로 이민가기 꼭 1주일 전 인터뷰다. 기사본문 위에 제호, 날짜, 지령까지 하나 하나 오려 붙인 스크랩이었다.

충희 씨는 또 유고시집 '그리운 금강산' 속 가족사항에 딸 소개가 잘못됐다며 '큰 손녀'를 미경(1984년 생)으로, '작은 손녀'를 미선(1989년 생)으로 바로잡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한상억은 미국 이민 직전에 가진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늘 인천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작품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모두 버리고 가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문화는 서울과 지방이 있을 수 없다. 모두가 한국의 문화인 것이다. 강원도 산골이나 인천 바닷가에서 일하면서 작품활동하는 것이 오히려 보람있고 필요한 것이다."

글 = 김민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