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자 후손들 타국생활 150년
일제 맞선 독립운동 중심역 조국은 까맣게 잊어
고난 뚫고 현지인보다 빠른 부 축적 각계서 활약
한국민, 고려인 현실직시하고 폭 넓은 교류해야

# 우리를 지킨 아픈 역사
고려인들의 시작은 1863년부터다. 사단법인 동북아평화연대에 따르면 고려인들은 1863년 함북 경원 출신 최운보, 양응남 등 2명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러시아 연방 시베리아 동해의 연안에 있는 지방 이름) 치신허 마을에 정착하면서 13가구가 농업을 시작한 것이 시초다.
이후 1년 만에 60가구 300여명으로 늘어나 부락을 이뤘다. 원래는 올해가 151주년이 되지만 러시아 정부에서 정식으로 이주허가를 받은 1864년을 기점으로 올해가 150주년이 된다.
고려인들이 최초로 조선땅을 벗어나 러시아로 갔던 이유는 빈곤과 기아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로부터 5년 동안 무려 800가구가 늘었고 한인촌을 형성했다. 그러나 조국이 없어졌다. 일제의 강제 병탄 때문이었다. 이에 고려인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효율적인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위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지역으로 넘어갔다.
연해주는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을 비롯 항일 열사들과 혁명가들이 본거지를 차리며 독립투쟁을 벌인 곳이다.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일제는 힘으로 동북아의 최강자로 군림했고, 러시아를 압박하거나 회유해 끊임없이 독립운동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이후 소비에트 치하 십수년간 연해주는 소수민족 고려인 20만명의 생활근거지로 존재했다.
고려인들은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한국인의 핏줄이기 때문이다. 강인함과 근면함, 성실함과 슬기로움은 우리의 근본이었다.
그들은 낯선 곳에서 온갖 고난을 뚫고 성공을 이루며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잡았고, 현지인들보다 더 빨리 부를 쌓아 사회 각계에 진출했다.
구소련 붕괴 후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새로운 차별에 다시한번 울었지만, 그들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와도 수교하고 긴밀하게 경제협력을 강화하며 살아왔다. 이들의 힘과 저력은 지금의 한국을 만들기에 충분한 청량제 역할이 됐다.

# 카레이스키를 가다
지난 7월 22일, 4박5일간의 일정으로 러시아 사할린 땅을 밟았다. 사할린은 러시아 동부, 하바롭스크(Khabarovsk) 지방의 한 주(州)를 이루는 섬이다. 주도는 유즈노사할린스크(Yuzhno-Sakhalinsk)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사할린스크시 공항까지는 3시간 10분이 소요됐다. 시차는 한국보다 2시간이 빠르다.
계절은 한국보다 1~2개월 앞서간 느낌이다. 7월 사할린스크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낮기온은 20~25도였으며, 저녁에는 15도까지 떨어지는 등 약간 쌀쌀했다. 하지만 겨울철이 되면 영하 30~40도까지 떨어진다.
사할린주에는 50여만명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고려인은 2만5천여명이다. 고려인 중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은 4천600여명에 달한다.
이 곳은 10년 전 3만5천여명이 살고 있었지만, 대부분 러시아 대륙 진출과 유학으로 빠져나갔다. 그나마 우리나라 정부가 러시아와 1992년부터 사할린 동포의 영주 귀국 사업을 벌인 끝에 얻은 효과다.
자동차는 일본 차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간혹 한국 차량도 눈에 들어왔다. 일본 차가 많은 것은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이다. 일본 차량을 그대로 들여오기 때문에 오른쪽에 핸들이 있는 차량이 많다.
이로 인해 교통사고가 잦다는 게 현지인들의 설명이다. 오른쪽 핸들로 왼쪽에서 마주오는 차량을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에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러시아 정부는 최근 들어 왼쪽 핸들 차량에 대한 수입만 허가하고 있어 최신식 차량들은 모두 왼쪽 핸들이다.
사할린주에 있는 차량들은 세단보다 SUV나 지프형이 주류를 이룬다. 워낙 도로사정이 좋지 않은 데다 겨울철 추운 날씨와 많은 눈으로 4륜구동 차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 도시끼리 연결된 도로가 주로 편도 1차로에 불과하고, 도로 일부는 비포장으로 돼 있어 차량들의 앞 유리가 대부분 금이 가 있다.
사할린주는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간직하고 있다. 도로에는 간헐적으로 여우를 비롯해 사슴, 노루, 곰 등이 출몰하고 있으며, 일부 동물은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 KAL기 폭파와 아픈 현실
러시아 사할린주에서 2시간 거리인 네벨스크시에는 우리의 아픈 과거가 숨어 있다. 1983년 9월 1일 뉴욕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KAL) 007편 보잉 747 여객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추락해 승객과 승무원 등 탑승객 269명이 숨진 사건이다.
벌써 31년 전의 일이지만 우리에겐 아픈 기억이다. 네벨스크시 외곽에는 이 사건으로 희생된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이 곳은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뒤 사망한 군인들을 공동으로 매장한 곳인데, 공동묘지다. 고려인들의 요청으로 네벨스크시는 이 곳에 KAL 여객기 추모비를 세웠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추모비를 세운 곳이 일본 신사와 함께 있어 마치 일본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또 추모비에 새겨진 글씨도 한글 대신 한문과 일본어가 섞여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이 곳 현지 고려인은 "한국 정치가들이 네벨스크시를 방문하고 있지만 이 곳을 찾는 경우는 드물다"면서 "이런 곳이 있는지도 잘 모를 것"이라고 씁쓸해 했다.
이어 "네벨스크시에서 더 좋은 위치에 추모비를 세울 수 있도록 이전 계획을 추진 중이지만, 한국 영사관이나 국민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 미래를 개척하는 고려인
고려인들은 각계 계층에서 뿌리를 내렸다. 현직 시장을 비롯해 한국어로 주간신문을 만드는 고려인, 연어알 하나로 세계를 주름잡는 고려인 등 한국민의 우수성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고 있다. 또 태권도를 러시아에 전파한 사람도 바로 고려인이었다.
이 곳에서 고려인들은 각자 맡은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과 노력으로 러시아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고려인들은 현재 연해주 인구의 3%에 불과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재정착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또 지난 150년 동안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에서 온갖 시련을 딛고 성공스토리를 써내면서 러시아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여준 우수한 인적 자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은 연해주를 개척해 옥토로 바꿨고, 중앙아시아에선 강제이주의 시련속에서도 이 지역 농업의 새역사를 창조했다. 다방면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한 것이다. 과거 냉전의 반세기 동안 단절돼 있으면서 한민족 네트워크의 사각지대에 방치됐던 고려인들이었지만 민족적 정체성만큼은 지켜왔다.
사할린주 네벨스크시 박 블라디미르 시장은 "처음에는 고려인들이 어려운 생활과 인종 차별로 많은 고생을 했지만 150년이 지난 현재는 각계 각층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면서 "우리는 같은 민족이다. 한국 국민들도 고려인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폭넓은 교류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전했다.
러시아 사할린주/신창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