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에 살고 있는 리은경(86) 씨는 1961년 10월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살던 양공주와 찍은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 리은경씨, 그의 아내, 양공주다. /리은경씨 제공
일본이 떠난 자리
또다른 점령군 미군
해방이 아니었다
그건 임무교대였다

이원규의 '겨울새' '달무리' 등 작품 들여다보니…
현장취재·어릴 적 체험 통해 미군 주둔 사회문제 조명
송유관 인근 아이·청년 조준사격에 양공주 살해 사건도
한국 최초의 기지촌 '부평' 1960년대 초반 양공주 1700명
1955~1960년 해외 입양아 3525명중 2240명이 '혼혈아'
땅굴 이용한 미군 군수물자 절도 '두더지 도둑'도 다뤄

8·15 해방과 함께 인천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미군을 맞았다. 1945년 9월 8일이었다. 미군을 환영하는 인파가 인천항 부두에 몰렸다. 거리 질서 유지 명분을 내세우며 나와 있던 일본 경찰이 느닷없이 인파를 향해 총질을 해댔다.

항일 독립운동가 권평근(權平根·당시 47세), 보안대원 이석우(李錫雨·당시 26세) 등 2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여러 명이 다쳤다. 해방 공간에서조차도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야 하는 현실에 군중은 분노했다. 이원규 소설 '황해'에는 당시 이 사건을 겪은 인천 시민들의 반응이 잘 드러나 있다.

돌덩이처럼 딱딱한 경찰들의 어깨너머로 배에서 내려 집결하고 있는 미국 군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훌쩍 큰 키에 철모를 쓴 군인들, 그들은 방금 자기들의 목전에서 일어난 일을 목격했을 터인데도 아무 느낌도 없다는 듯이, 어떤 움직임도 취하지 않을, 이 나라를 해방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일본처럼 또 하나의 점령군으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중략)… "서형, 해방이 아니에요. 두 나라가 임무교대를 하고 있어요."

제2차 세계대전 승전과 함께 미 24군단은 남한 점령 계획인 '베이커-포티 작전'에 따라 진주했고, 군정(軍政)을 실시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군은 지금까지 줄곧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완전히 철수한 적은 1949년 6월부터 1950년 9월까지 고작 1년 남짓이다. 그 출발점 인천에는 아직도 미군 부대가 있다.

우리나라 작가 중 인천에 주둔한 미군과 기지촌을 가장 실감나게 그린 작가로는 이원규(67)가 있다. 그는 '겨울새'(1987년), '달무리'(1987년), '겨울의 끝'(1988년), '까치산의 왕벌'(1993년)을 통해 인천의 미군 이야기를 다뤘다. 현장 취재를 통해 얻은 사실을 종합한 것뿐만 아니라 작가 본인의 어릴 적 체험도 담았다.

미군 주둔은 한반도에서 전쟁 억지력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지만, 그에 따른 사회적 문제점도 많았다.

"겟 아우트 옐로우 쌔비지(꺼져라, 황색 야만인놈아)!" 좁디좁은 길, 미군 지프 앞에 가는 젊은 남녀를 향해 길을 비키라며 미군 병사가 내뱉는 이 욕설 한마디로 이원규는 미군이 한국인을 얼마나 무시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송유관이 개통된 이후 철둑은 밤낮으로 순찰병들이 배치되어 도대체 접근할 수가 없었다. …(중략)… "얘, 사람덜이 너한테 파이푸를 열어달라구 헐 모양이다. 미군 순찰한테 들키면 총을 맞을지두 모르는 일이 아니냐. 칼 물구 뜀뛰기하듯이 위험한 일이라 난 벌써 가슴이 떨린다.-<'까치산의 왕벌' 중에서>
인천 남구 숭의동·용현동의 송유관 도둑을 그린 '까치산의 왕벌'은 실제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어 창작한 것이다. 지난 달 30일 인천시 남구 숭의동 정아슈퍼에서 만난 김윤수(78) 씨는 비교적 정확하게 '오일 웜(기름 벌레)'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김 씨는 "숭의교회 옆에 영국 부대가 있었고, 그 옆으로 송유관이 있었다"며 "당시 용현동 사람들이 자정 무렵에 송유관 근처에 나가 새벽까지 논밭에 흐르는 기름을 퍼 담아서 먹고 살았다"고 말했다. 이를 막기 위한 미군의 경계 근무는 삼엄했다. '접근시 발포'는 경고에만 그치지 않고 실행됐다.

1957년 7월에 송유관 위에 앉아 놀던 세 살배기 김용호 어린이가 미군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아 숨졌고, 같은 해 8월에도 송유관 인근 염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18세 조병길 군 역시 미군이 쏜 총에 왼쪽 팔과 복부를 맞아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은 대낮에 놀이 삼아, 사격 훈련 삼아 아이와 노는 청년을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해 죽인 것이다.

작가 이원규는 "미군은 부대 내에서 한국인이 맥주·잼을 훔치는 것을 적발하면 현장에서 한 상자를 다 먹을 때까지 계속 폭행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

미군은 일제가 세운 부평 무기공장(조병창) 시설을 기지로 사용했다. 1962년 7월 29일자에 동아일보가 게재한 '미군부대촌의 현실-부평'을 보면, 부평은 휴전 이후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인구는 해방 직후의 두 배가량인 8만 명을 헤아렸다. 또 크고 작은 군부대 20여 곳에서 한국인 8천 명이 일했다고 한다.

미군 부대 주변에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양공주'들이 모여들었다. 1960년대 초반 부평의 양공주는 약 1천700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양공주'를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도 몰렸다. 부대에서 나오는 미제 물자도 나돌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지촌은 이렇게 부평에서부터 형성되었다.

워낙 가난한 마을이었으므로 꿀꿀이죽을 먹는 집이 절반이 넘었다. 마을을 굽어보듯이 우뚝 선 철마산 너머 부평평야에 자리잡은 크고 작은 미군 부대들. 거기서 나온 폐품과 식당 찌꺼기를 처리하는 곳은 바로 그 산 너머에 양공주촌과 붙어 있었다. 우리 동네는 거기서 나오는 폐품으로써 살림살이의 많은 부분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겨울새' 중에서>
이 작품 속 폐품처리장은 지금의 인천 서구 가정오거리와 계양구 효성동 군부대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인천 서구 연희동에서 태어난 이원규는 "집안 어른들을 따라 우마차를 타고 2~3차례 구경간 적이 있는데 초등학교 하나 정도 크기의 공간에 말 그대로 '없는 게 없는 곳'이었다"면서 "그 중에서도 양말과 내복이 인기 품목이었다"고 말했다.

꿀꿀이죽은 미군 식당의 잔반이다. 폐품처리장에서 팔았다. 미군이 손조차 대지 않고 버린 게 상급이었고, 음식 건더기를 걸러서 모은 것이 중급이었다. 하급의 경우 담배 꽁초와 이쑤시개, 심지어 콘돔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양공주는 '양색시', '양키 마누라', '유엔 레이디', '양갈보' 등으로 불렸다. '겨울새'에 등장하는 양공주는 '양키하고 붙어서 나온 튀기' 아들을 새별(효성동) 인근의 한 민가에 보내 기른다. 한국전쟁 이후 부평의 양공주들은 주로 산곡동, 청천동, 신촌 등지의 영단주택, 판잣집의 단칸방에서 '영업'을 했고 아이가 있으면 인근 마을에서 따로 키웠다.

혼혈아는 아빠를 따라간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외 입양되거나 고아로 남았다. 1955~1960년 우리나라에서 해외로 입양된 3천525명 중 2천240명(64%)이 혼혈아였다는 통계도 있다.

한국에 남은 혼혈아의 절반가량은 경기도·인천의 미군부대 주변에 거주했다. 부평에 명성원이 펄벅재단의 후원으로 운영됐는데, 많을 때는 130명가량의 원생이 이곳에서 지냈다.

양공주를 전담하는 경찰서도 있었다. 1947년 인천에 여자경찰서가 신설됐는데 '불량 부녀자'의 재활을 돕고, '화류병'(성병)을 관리했다. 성병도 심각했던 모양이다.

1969년 1월 보사부와 미8군이 동두천, 운천, 용주골, 부평, 오산 등 5개 지역 윤락여성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32%가 임질, 6.5%가 매독 보균자였다. 이 중 부평은 임질 14%, 매독 9.5%였다. 1개월 뒤 보사부는 이들 지역 윤락여성 1만4천 명에 대한 치료에 나섰다는 당시 신문 보도도 있다.

양공주를 상대로 한 참혹한 살해사건도 많았다. 1969년 5월엔 부평에서 양공주의 성병 검진 상태를 살피러 나갔던 여경이 한 양공주의 시신을 발견했다. 숨진 양공주는 옷이 다 벗겨진 알몸이었고, 온몸이 칼로 난자를 당한 채였다. 목에는 전깃줄이 감겨 있었다.

지난 달 29일 오후 부평 산곡1동주민센터 부근에서 1950년대 부평 미군부대 군속 출신인 리은경(86)씨를 만났다. 그는 지금 한양아파트 자리에 있던 부평비행장에서 1959년부터 약 3년간 근무했다. 그 기간에 산곡동 집에서 양공주에게 세를 줬는데, 많을 때는 3명까지 있었다.

리씨는 "당시 미군부대 월급이 많았고, 들어가려면 여기저기 줄을 대야 했다"고 했다. 리은경 씨 역시 고향 사람이 부평에서 통역관을 하고 있어 미군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미군에 취직하려면 기술 등록을 하고 인터뷰를 기다려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통역관의 역할이 컸다고 그는 말했다.

리은경 씨는 "여기 사람들 거의가 다 미군과 관련한 일로 먹고 살았고, 양공주에게 세 줘서 돈을 벌었다"고 했다.

'달무리'는 미군부대로 땅굴을 파고 군수 물자를 훔치는 '두더지 도둑' 이야기다.

동생의 배가 바가지를 엎은 것처럼 불룩 솟아올랐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더운 여름날 상한 꿀꿀이죽을 먹어서 가스가 찬 것이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쌀밥 한 공기 해먹이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중략)… 저 창고에 의약품이 가득 차 있어요. 페니실링·구로마이싱·다이아찡 같은 건 금값허구 맞먹어요. 명섭이 치료를 하구 한밑천 잡을 수 있어요.

다이아찡은 미군 진주와 함께 들어온 약으로 1950년대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 '돈푼이나 있는 사람들'이나 명섭이처럼 위독한 환자를 살리려는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약을 구하려 했다.

'달무리'에서도 명섭의 삼촌이 군부대로 땅굴을 뚫고 의약품을 훔쳐 조카를 치료하고 돈을 벌기 위해 땅굴을 파다가 흙더미에 깔려 죽었다.

1970년대 전후 인천 미군들은 명섭이 삼촌과 같은 땅굴 절도단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았다. 일명 '털보파'라는 절도단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인천 신흥동 미극동교역처 창고 등 8곳의 미군기지에서 군복, 철제 침대, 자동차 부속품 등을 훔친 혐의로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이원규는 "'우리에게 미군은 무엇인가', '미군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어렸을 때부터 겪고 들은 미군 이야기를 양심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글 = 김명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