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 등 인천에 수용소 3곳이나 위치해 전쟁 포로와 연관성 깊어
서해교전·연평도 포격 등 지금도 남·북 군사적 대립·이념논쟁 진행중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중립국으로 가는 석방 포로를 실은 인도 배 타고르호는,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칠한 3,000톤의 몸을 떨면서, 물건처럼 빼곡히 들어찬 동중국 바다의 훈김을 헤치며 미끄러져 간다.
최인훈(崔仁勳, 1936~)의 '광장'은 한국전쟁 휴전 이후, 인천항을 떠나 당시 중립국인 인도로 가는 배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배에는 주인공 이명준 등 본국 송환을 거부한 한국전쟁 포로들이 타고 있다.
소설을 벗어나 실제도 그러했는데, 본국 송환을 거부한 전쟁 포로 77명(중국인 포함 88명)이 1954년 2월 인천항에서 영국 수송선 '아스투리아스호'(Asturias)를 타고 인도로 떠났다. 당시 인천항에선 이들을 중립국으로 보내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소설 속 명준은 남한과 북한 사회에 실망감을 느껴 인도행을 선택했다.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땅에서 새 삶을 시작하길 희망했다. 이념 차이로 인한 살육에 혐오를 느꼈다. 포로수용소 역시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친공과 반공 포로간 유혈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명준은 서울의 한 대학교 철학과를 다니는 학생이었다. 그는 남한 사회에 환멸을 가졌다.
"정치? 오늘날 한국의 정치란 미군부대 식당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받아서, 그중에서 깡통을 골라내어 양철을 만들구, 목재를 가려내서 소위 문화주택 마루를 깔구, 나머지 찌꺼기를 가지고 목축을 하자는 거나 뭐가 달라요? (…중략…) 추악한 밤의 광장, 탐욕과 배신과 살인의 광장. 이게 한국 정치의 광장이 아닙니까?(중략)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 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 있습니다."
앞서 명준의 아버지는 남로당 활동을 하다 해방 그해 북으로 갔다. 명준은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 가 고문을 당했다. 빨갱이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이런 남한 사회가 더 싫어졌다. 명준에게는 인천 사는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집에 머물다 돌연 월북했다.
뱃고동. 산새 울음. 소주잔을 들어서 쭉 들이켠다. 목에서 창자로 찌르르한 게 흘러간다. 이 목로술집은 인천에 와서부터 단골이다. 얼마 붐비지 않는 게 좋았고, 내다보이는 창밖이 좋다. 마룻장 밑에서는 바다가 철썩거린다. 다 탄 담배를 창밖으로 던진다. (…중략…) 주인이 명준에게 한 귀엣말은 이런 것이었다. "이북 가는 배 말씀입죠."
얼떨결에 월북했지만 명준은 북한에 이상적인 사회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북에서 노동신문 기자로 일하던 명준은 국립극장 소속 발레리나 은혜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명준은 인민군으로 참전하고, 은혜는 간호병이 됐다. 하지만 유엔군의 폭격으로 은혜는 숨지고 명준은 포로로 잡혔다. 은혜는 명준의 딸을 가진 상태였다. 명준에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명준이 갈구한 '진정한 광장'은 남한과 북한 그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명준은 북한, 남한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했다. 그리고 인도로 가는 배에서 바다에 투신했다. 거기에 명준이 바라는 '광장'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천은 소설 '광장'에서 주요한 공간으로 등장한다. 남한에서 명준에게 큰 위로가 되어 준 여자친구의 집이 인천에 있었고, 명준이 어선을 타고 월북한 곳도 인천이다. 인천이 남한과 북한을 잇는 상징 장소인 것이다.
지금도, 인천은 남북 군사적 대립과 이념 논쟁의 '현장'이다. 서해교전, 북한의 연평도 포격, 맥아더 장군 동상을 둘러싼 보수·진보단체간 갈등이 이를 증명한다.
소설 '광장'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전쟁 포로'와 인천과의 연관성도 깊다. 인천에는 3개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인천항 인근의 연합군포로수용소, 한국전쟁 당시 남구 포로수용소와 부평 포로수용소다.
연합군포로수용소는 중구 신흥동3가 신광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일제는 신사(神社, 현 인천여상 자리)와 인천항을 보호할 목적으로 이곳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남구 학익동에 있던 인천소년형무소(현 인천구치소)는 인민군 포로수용소로 활용됐다.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포로 수가 급증하자, 인천소년형무소를 수용소로 활용했다.
이곳 포로 수는 9월 말 6천여명에서 11월 초 3만2천여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 수용소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악화되자 12월 폐쇄됐다. 이곳 포로들은 기차 또는 배를 통해 부산 등 지방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됐다.
반공포로 출신 이형근(85)씨는 "인천형무소에 있다가 인천항의 수송선을 통해 부산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됐다"며 "인천형무소는 인민군 포로들로 만원이었다. 형무소 주변까지 철조망과 천막을 쳐 놓았을 정도"라고 했다. 인천상륙작전 직후에는 월미도에 임시수용소도 설치됐다.
유엔군은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친공과 반공 포로 간 살육전이 벌어지는 데다, 포로 통제에 어려움이 크자 1952년 6월부터 포로 분산작전을 벌였다. 이로 인해 1953년 3월 부평미군부대에 제10포로수용소가 설치됐다. 여기에는 약 1천500명의 반공포로들이 수용됐는데, 현 부영공원 자리다.
부평포로수용소는 '반공포로 석방사건' 때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곳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했다. 당시 논산, 광주, 부산, 부평 등 8곳에 수용돼 있던 반공포로 3만5천698명 중 2만7천388명이 석방됐다. 부평포로수용소는 '석방'이 아닌 '탈출'이었다. 하루 늦은 19일이었다. 부평포로수용소 헌병대장이 헌병 총사령관의 반공포로 석방 지시를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포로들은 이 헌병대장이 '빨갱이'였기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했다. 부평에는 1천486명이 갇혀 있었는데, 탈출 과정에서 수용소를 지키던 미군의 사격으로 42명이 숨지고 6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탈출에 성공한 포로는 538명이었다.
반공포로 출신 노관명(87)씨는 부평포로수용소 탈출에 성공했다. 노씨는 "부평수용소에 3개 대대가 있었다. 1개 대대에 500명씩 있었는데, 나는 1대대 경비 부관이었다"며 "포로들이 철조망에 담요를 덮고 넘어가자, 미군들이 기관총을 쐈다"고 했다. 이어 "당시 수용소 주변은 모두 논바닥이었다"며 "부평 민가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창영교회에서 보호받았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뤄졌다. 당시 남북은 본국 송환을 거부한 포로 문제를 중립국송환위원회에 의해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대표 의장국인 인도, 유엔군 측의 스위스와 스웨덴, 공산군 측의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로 구성된 '중립국송환위원회'와 인도군은 그해 9월 인천항을 통해 입국, 비무장지대에 도착했다.
판문점. 설득자들 앞에서처럼 시원하던 일이란, 그의 지난날에서 두 번도 없다. (…중략…)
"동무, 앉으시오."
명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본국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휴전회담의 핵심 의제였다. 남북은 휴전 후에도 이어진 '이념 전쟁'에서 서로 승리를 거머쥐려 했다. 명준의 중립국 선택은, 또 그의 죽음은 한국전쟁이 승자도 패자도 없는 '민족의 비극'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바다를 본다. 큰 새와 꼬마 새는 바다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다. 바다.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 부채꼴 사북까지 뒷걸음질 친 그는 지금 핑그르 뒤로 돌아선다. 제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중략…) 무덤을 이기고 온, 못 잊을 고운 각시들이, 손짓해 부른다. 내 딸아.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실제로는 본국 송환을 거부한 전쟁 포로 77명 모두가 인도에 도착, 그곳에 머물러 살거나 브라질 등에 정착했다. 인도에 남은 마지막 반공포로 현동화(82)씨는 지난달 뉴델리에서 인천아시안게임 성화 봉송 주자로 뛰기도 했다.
일러스트/박성현기자
글 = 목동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