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자전적 연작소설 눈길
유골 뿌리는 곳이 '강화 양사면'

대룡시장·망향단·줄무덤 등
교동도엔 실향민 상처 고스란히 간직
인천은 지리적 이유로 이북출신 많아


서해와 한강 하구가 만나는 지점 너머로 북한 땅 개풍군과 연백군이 보인다. 예성강을 가운데 두고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마을은 시멘트나 벽돌로 외벽을 쌓은 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듯한 흰색의 단층 건물 일색이다. 논에서 일하는 북한 주민들, 산 중턱까지 올라간 밭이 눈에 띈다.

지난달 25일, 인천시 강화군 양사면 강화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 땅은 손에 잡힐 듯했다. 개풍군까지의 최단 거리는 2.3㎞.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고, 물살을 가로질러 헤엄을 쳐도 금세 닿을 듯했다.

올 때마다 남한과 북한이 이렇듯 가깝다는 게 새삼스럽다. 북한 땅이 보이는 해안가에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다. 강화군 하점면 신봉삼거리에서 강화평화전망대 가는 길에는 군 검문소가 있다.

이름, 생년월일, 휴대전화 번호 등을 알려줘야 통과할 수 있다. 검문소와 해안 철책선은 이곳이 맘대로 드나들 수 없는 민통선 지역이라는 것을, 60년도 더 지난 한국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체감케 한다.

박완서(朴婉緖, 1931~2011)는 자전적 연작소설 '엄마의 말뚝'에서 한국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그렸다. '엄마의 말뚝'은 모두 세 편으로 돼 있다.

이 중 '엄마의 말뚝2'는 한국전쟁과 오빠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데, 오빠의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장소가 북한 땅과 지척인 인천 강화도 양사면(소설 속 지명은 양산면)이다.

소설 속의 오빠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총상을 입고,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되지 않아 숨진다. 어머니는 아들(오빠)의 유해를 안고 고향 땅 개풍이 보이는 인천 강화도를 찾는다.

오빠의 살은 연기가 되고 뼈는 한 줌의 가루가 되었다. 어머니는 앞장서서 강화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우린 묵묵히 뒤따랐다.

강화도에서 내린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멀리 개풍군 땅이 보이는 바닷가에 섰다. 그리고 지척으로 보이되 갈 수 없는 땅을 향해 그 한 줌의 먼지를 훨훨 날렸다.

아들이 빨갱이인지, 흰둥이인지는 어머니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았다. 아들의 목숨을 앗아 간 그놈의 전쟁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아들의 유해를 바다에 뿌린 지 수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어머니는 아들을 잊지 못한다. 또 우리 민족이 왜 남과 북으로 갈려 분단의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지척의 고향 땅을 왜 밟지 못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병든 어머니는 사후(死後)에 아들처럼 한 줌의 가루가 되어 개풍군과 강화도 사이 바다에 뿌려지길 희망한다. 어머니는 아들을 죽인 전쟁을, 고향 땅을 막고 서 있는 분단이란 높디높은 장벽을 아직 용서하지 못했다.

인천 강화군에는 한국전쟁 때 피란 온 이북 출신 실향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특히 북한 땅에 서북(西北)이 둘러싸인 듯한 모양의 교동도는 실향민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황래하(73)씨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 해남리 518번지다. 한국전쟁 때 교동으로 피란을 왔다. 1950년 8월 25일이다. 황씨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황씨는 "연백 불당포 포구에서 어머니, 형님과 함께 몰래 목선을 타고 교동으로 왔다"며 "배 안에서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고향 땅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생각난다"고 했다.

당시에는 전쟁 중인데도 교동도와 연백군을 왕래하고는 했다. 어느 날, 어머니는 고향 집에 묻어 놓은 놋그릇을 챙겨 오겠다며 연백으로 떠났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황씨는 "어머니가 집에 올 것만 같았다. 집 앞에서 나를 부를 것 같았다"며 "어머니가 언제 내려올지 몰라 항상 현관문을 열어 놓고 살았다"고 했다. 황씨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남향이 아닌 이북 방향으로 집을 지었다.

서경헌(69)씨도 한국전쟁 때 가족과 함께 연백에서 교동으로 피란 왔다. 당시 교동의 토양은 척박했다. 잘 곳도 마땅치 않고, 먹을 것도 부족했다. 고향을 떠난 설움도 모자라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먹을 것을 찾아오겠다며 다시 고향 땅으로 들어간 할머니와 누나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서씨는 "부모님이 '곧 고향에 간다. (고향과) 가까운 데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기다린 세월이 60년이 지났다"면서 "북에 누님이 살아 계신다면 73살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또 "전쟁이 있기 전에는 교동도와 연백군이 하나의 마을이나 다름없었다"며 "교동 사람들은 강화도로 가지 않고 '연백장'에서 먹을거리를 장만했다"고 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강화군협의회는 2008년 4월 실향민 증언록 '격강천리라더니'를 발간했다. 이 책에는 이북에 부모나 자식을 남겨 놓고 피란 온 사연, 갓난아이를 바다에 던질 수밖에 없었던 일 등 실향민의 아픔과 상처가 담겨 있다.

가장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몰래 소리를 죽여가며 배를 저어가고 있는데,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뱃사공은 아기를 빼앗아 바다에 빠뜨렸다.

아기 엄마는 당혹해 하며 아기를 건지려 바다에 뛰어들었다. 누구도 그들을 도울 수 없었다. 자칫 인민군의 다발총 사격으로 모두 다 위기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격강천리라더니' 中 김옥분씨 증언)

한국전쟁 당시 교동도에 정착한 피란민은 1만 명이 넘었다. 하지만 지금은 50가구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한다. 외지로 떠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실향민에 의해 형성된 교동도 대룡시장 골목길. 1960~70년대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예점을 운영하고 있는 최안례(55)씨는 "한국전쟁 때 피란 나온 분들이 만든 시장"이라며 "비어 있는 가게가 많다. 실향민 1세대 상당수는 아프거나 돌아가셨다"고 했다.

대룡시장에서 만난 조희순(71·가명, 용인시 보라동)씨는 자신이 다닌 초등학교를 찾고 있었다. 이북에서 교동으로 피란 내려와 봉소리국민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조씨는 "교동에서 5년 정도 살다가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이사를 갔다"며 "주변은 많이 변했는데, 시장 길은 그대로다"고 했다. 교동에 오고 싶었던 적이 있었냐고 묻자, 그녀의 남편이 말을 받는다. "가끔 와요. (부인이) 평소에도 오고 싶어 안달이에요." 조씨에겐 교동도가 제2의 고향인 것이다.

북한 땅이 보이는 교동도 북쪽에는 이북 방향으로 나란히 선 '줄무덤'이 많았다고 한다. 죽어서도 고향을 바라보고 싶은 실향민들의 애틋한 마음이 무덤을 그렇게 쓰게 한 것이다. 지금은 자식들이 유골을 수습해 납골당에 모시는 추세여서 그 '줄무덤'마저도 희미해지고 있다.

소설 '엄마의 말뚝'처럼 고향 땅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유골을 뿌리는 실향민이 지금도 있을까. 철책선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한다.

교동도 지석리에는 연백군민회에서 만든 망향단이 있다. 연백군에서 피란 온 실향민들은 고향이 보이는 이곳 망향단에서 제를 지낸다.

실향민 이범옥 할머니는 고향을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

격강천리(隔江千里)라더니/바라보고도 못가는 고향일세//한강이 임진강과 예성강을 만나/바다로 흘러드는데//인간이 최고라더니 날짐승만도 못하구나/새들은 날아서 고향을 오고 가련만//내 눈에는 인간을 조롱하듯 보이누나//비오듯 쏟아지는 포탄속에 목숨을 부지하려/허둥지둥 나왔는데/부모형제 갈라져 반 백년이 웬 말인가?//함께 나온 고향친구 뿔뿔히 흩어지고/백발이 되어 저 세상 간 사람 많은데/남은 사람 고향발 디딜날 그 언젠가!

통일부에 따르면 올 8월 말 기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인천 거주자는 5천744명으로, 10년 전보다 약 2천900명 줄었다.

단순 계산으로 1년에 290명 정도가 세상을 떠난 셈이다. 이범옥 할머니도 고향 땅에 발을 디딜 날만 기다리다 지난 2011년 8월 저세상으로 떠났다.

인천은 지리적 이유 때문에 이북 출신 실향민이 많이 살고 있다. 이북5도 인천사무소는 인천에 거주하는 이북 출신 실향민 가족을 7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천시내의 경우, 동구 송림동과 남구 용현동 등지에 실향민이 많이 살았다. 남동구 소래포구도 1960년대 실향민들이 새우잡이를 하면서 형성됐다.

'인천지구 평안남도민회' 황윤걸(82) 사무국장은 한국전쟁 발발 이듬해 11월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홀로 피란 왔다. "두 달 후에 만나자"며 고향을 떠났는데, 어느덧 60년이 넘었다고 한숨지었다.

황씨는 "흰 쌀밥, 고깃국을 먹을 때면 부모님 생각이 난다"며 "며칠 전(9월25일)이 아버님 생신이어서 집에서 제사를 지냈다. 기일을 알 수 없어 생신날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는 게 죄송스럽고 가슴 아프다"고 했다.

글·사진 = 목동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