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CF·세계은행 이어 금융타운 등
지금의 모습, 개항시기와 닮은꼴

은행거리 배경 역사적 사실 다뤄
일본, 경제침탈위해 은행 앞세워
화폐도 바꾸려하자 상인들 '반발'
백동화 남발에 위조화폐 문제도
금융주권 확보 노력 불구 수포로


'인천은 이야기가 득실득실한 도시'라고 소설가 김탁환(47)은 말했다. 지난 7일 서울 목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돈이 지배하는 세상, 당대의 문제의식'으로 100여년 전 인천의 '은행 거리'를 파고들어 장편 '뱅크'를 썼다고 했다.

"다음 세상의 척도는 돈이라고 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뱅크'의 배경은 1900년 전후의 인천이다. 그가 볼때, 인천은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튼 곳이다.

소설가 김탁환에게 국제금융기관격인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이 최근 인천에 들어섰다고 했더니 흥미로워했다.

GCF 사무국이 본 궤도에 오르면 직원 500명이 상주하고, 사무국 주변에 기금을 따내려는 국제 에이전시가 인천에 몰려들 것이다. 세계은행(WB) 한국사무소도 인천에 둥지를 틀었다. 하나금융은 인천 청라국제도시에서 금융타운을 추진하는데, 서울 외곽에 조성하는 첫 금융기관 클러스터가 될 전망이다.

인천시 세금을 운용하는 시금고 모집 경쟁은 다른 도시들과 비교할 때 유독 치열하다. 몇 년 사이 인천은 금융기관이 주목하는 도시가 됐는데, 김탁환이 소설 '뱅크'에서 재현해 낸 100여년 전의 인천이 그랬다.

장편 '뱅크'의 시간적 배경은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부터 러일전쟁 시기인 1905년까지다.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흐른다. 치열한 '돈줄' 쟁탈전이다.

세 사람은 대불호텔을 지나서 은행거리로 접어들었다. 일본제1은행과 일본제18은행이 개점하면서 이 넓은 길은 '은행거리'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중략)…왜나막신을 신은 일본인들로 붐비는 은행거리로 다시 접어들었다.

여름에 개점 예정인 제58은행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초상집과 감옥의 서글픔 따윈 낄 자리가 없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열망이 건물과 함께 우뚝했다.-<뱅크 중에서>

지난 5일 오전 소설 '뱅크'의 배경인 인천 중구청 앞 일명 '은행거리'. 중구청 정문 앞 신포로 23번길을 따라 일본 제1은행, 제18은행, 제58은행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제1은행과 제18은행은 중구청이 개항박물관, 근대건축전시관으로 운영하고, 제58은행 건물은 중구요식업조합이 사무실로 쓰고 있다. "개항 이후 이 거리에 은행과 보험회사 약 20곳이 몰려 있었다"고 개항박물관 전경숙 문화해설사는 설명했다.

개항 시기 인천에는 일본 금융기관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개항 이후 도쿄 제1은행, 나가사키 제18은행, 오사카 제58은행이 인천에 지점을 뒀다.

이중 나가사키 제18은행이 최초의 지점을 인천에 만든 게 눈에 띈다. "메이지 23년(1890년) 국내외 최초의 제1호 지점으로 당시의 조선국 인천에 지점을 개설했다"고 현재 나가사키에 본사를 둔 18뱅크(18bank)는 은행 연혁에 기록해 놓고 있다.

1890년대 인천에 살고 있는 일본인의 절반가량은 야마구치(山口), 나가사키(長崎) 사람들이었다. 나가사키 사람들은 선박운송업, 고리대업, 무역상, 미곡상, 정미업, 여관업, 과일상, 양복상, 요리업, 은세공업, 생수업, 전당포, 우유업, 철공업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했다.

18은행은 나가사키 출신 상인들을 위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지점을 만들었을 것이다.

서울이 아닌 인천에 돈을 찍어내는 전환국이 있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인천전환국은 주로 백동화를 주조했는데, 백동화는 대한제국이 재정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발행하던 화폐였다.

대전에 있는 화폐박물관 황윤지 학예사는 "항구 도시 인천이 주화 제조용 원료를 수입하는 게 용이해 인천에 전환국이 생겼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면서도 "서울보다 일본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인천에 전환국이 설치됐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말했다.

나라를 잃으면 장사도 맘대로 못하게 돼. 가난한 나라를 식민지로 둔 부자 나라 상인이 대거 몰려들기 때문이지. 부자 나라 상인이 이문이 큰 물품 거래를 독점할 거야. 나랏일 따로 장사 따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 둘이 하나로 묶여 돌아간단 뜻이지.-<뱅크 중에서>

일본은 조선 경제 침탈을 위해 은행을 앞세웠다. 조선 상인들은 개항장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는커녕 일본 상인들에게 밀려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 1899년 개성, 서울, 인천 상인들은 대한제국 황실의 재정 지원을 받아 '대한천일은행'을 세웠다.

은행의 이름에 '천일(天一)'을 넣은 것은 '하늘아래 으뜸 가는 은행'이란 뜻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은행'으로 불리는 대한천일은행의 첫 번째 지점은 인천(현 동인천등기소 자리)에 설치됐다.

개항장 상품의 유통 중심지이자, 국제은행 거리가 조성돼 있던 인천에 민족은행의 첫 번째 지점이 들어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대한천일은행은 인천 다음으로 개성에도 지점을 뒀는데, 인삼 취급을 위해서였다.

대한천일은행 설립에 전환국장 출신인 황실 관료가 참여했다. 대한천일은행을 통해 황실은 백동화 유통을 확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같은 유통책을 방해했다. 1902년 인천 일본상업회의소는 '한국에서 통용되는 화폐를 일본 화폐로 대체하자'고 결의했고, 이후 일본 제1은행이 은행권을 발행했다.

인천신상협회(인천상공회의소의 전신)는 일본 제1은행권 수취 거부운동을 벌이며 일본의 움직임에 맞섰다. 인천신상협회 창립을 주도한 서상집은 인천 객주로 대한천일은행 초대 인천지점장이었다.

조세금 중 상당수가 백동화로 걷혔다. 전환국에서 백동화를 지나치게 많이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위조 동전까지 등장하여 그 가치가 폭락했다. 지방에서는 백동화를 받지 않는 가게도 적지 않았다. 조세금을 백동화로 걷는다는 것은 팔도 방방곡곡에 백동화를 유통시키겠다는 대한제국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 <뱅크 중에서>

정부가 백동화를 남발하고 일본에서 위조 화폐가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백동화는 일본의 금융 침탈에 맞선 화폐이면서도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영국인 저널리스트 앵거스 해밀튼(Angus Hamilton, 1874~1913)이 1904년 남긴 기록에는 당시 상황이 생생하다.

"일본에서 증기선이 들어올 때마다 많은 양의 위조 동전이 대량으로 들어와 국내로 밀수된다. 정부는 불법 거래로부터 이익을 챙기는데만 관심이 있어, 이런 것이 국가의 지급 능력에 항구적인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무시하면서 이런 평가절하된 동전을 유통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러일 전쟁 당시 조선에 대한보고서'에서

앵거스 해밀튼은 당시 제물포에서는 '정부 백동화', '1급 위조 동전', '2급 중급 위조 동전', '밤에만 통용되는 돈' 등 4가지만 유통됐다고 꼬집었다. 1902년 한 해 동안 제물포세관이 압수한 위조 동전은 무려 357만여개였다고 한다.

대한제국이 대한천일은행 설립 등을 통해 독립된 국가로서 금융 주권을 확립하고자 했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화폐·재정 정리사업을 실행해 전환국을 폐쇄하는 등 한국 경제 시스템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주물렀다. 대한천일은행에 일본인들이 참여하기 시작했고, 민족은행 설립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인천은 그 어느 곳보다 새로운 이야기가 많이 들어오고 지난 이야기가 쉽게 잊히는 도시였다. - <뱅크 중에서>

개항기, 인천의 은행을 소재로 소설을 쓴 건 김탁환이 처음이다. 그는 2011~2012년 소설 '뱅크'를 한 신문에 연재할 당시 일주일에 2~3번씩 인천을 찾았고, 일본·청국 조계지를 가르는 계단에 앉아 '인천의 냄새와 소리와 빛깔을 기록'하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인천은 여러가지가 섞여 있고, 인물들의 욕망이 잡탕밥처럼 얽혀있는 도시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며 "인천을 소재로 한 소설을 집필중이고 내년 말에 발표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한편, 드라마 제작사 에이스토리는 소설 뱅크를 50부작으로 만드는 것을 추진중이다. 에이스토리 오승준 제작2팀장은 "인천을 주요 배경으로 삼고 은행에 포커스를 맞춰 개항기의 경제 이야기를 풀어놓으려고 한다"고 했다.

김탁환이 주목한, 개항기 인천의 은행거리가 드라마를 통해 대중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글 = 김명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