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동안 200만부 넘게 팔려 / 역경 속 서로 도우며 희망 꿈꾸는 아이들 이야기
근현대사 질곡의 순간 켜켜이 쌓여 / 가구수도 점점 줄어 대부분 어르신들만 남아
다닥다닥 붙어 살던 정겨움 추억으로 / 함께 어울려 뛰노는 동심 '밝은 모습' 눈길


김중미의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인천을 배경으로 한 소설 중 가장 많이 읽힌 책으로 꼽힌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2000년 처음 나온 이후 지금까지 14년 동안 2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책이 유명해지면서 인천 동구의 빈민촌 괭이부리말도 덩달아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이 책은 제목처럼 인천시 동구 만석동의 '괭이부리말'이 배경이다. 인천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 사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각박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마음만은 어느 동네보다도 더 부자인 사람들이 많다.

괭이부리말에 사는 박영호는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살게 되면서 같은 동네에 사는 동준이와 동수 형제를 자기 집에 데려다 함께 산다. 형인 동수는 늘 말썽만 부리는 속칭 불량청소년이다. 영호는 그 동수 형제 구호에 지극정성이다.

이런 영호에 비해 이 동네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영호의 어릴 적 친구 김명희 선생은 자신이 졸업한 학교이건만 못사는 동네에 배치된 게 영 못마땅하다.

다른 학교로 전근갈 생각뿐이던 김명희 선생도 친구 영호와 그를 따르는 아이들을 알게 되면서 진정한 '이웃'으로 변신한다. 김명희 선생만 바뀐 게 아니다. 동수도 변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야간학교에 다니게 된 동수는 공장 한 편에 돋아난 민들레 새싹을 보고는 그 뿌리 주위에 흙을 긁어 덮어줄 정도로 건전 청년으로 탈바꿈한다.

영호는 말한다. "아이들한테 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나한테 아이들이 필요하다"고. 몇 년 전 가난을 벗어났다는 신호로 온 가족이 연수구 고층 아파트로 이사를 갔던 김명희 선생은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괭이부리말로 이사했다. 김명희 선생은 "혼자 높이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김명희 선생은 또 낡아빠진 집으로 이사하면서 그 집 문 앞에 선 것이 아파트 엘리베이터 자동문 앞에 섰을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

'괭이부리말 아이들'과 관련해 노출되기를 꺼리는 작가 김중미는 지난 2일 전화 인터뷰에서 "가난하기 때문에 서로 도울 수 있고 나눌 수 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가난한 아이들의 이야기지만 동정의 대상은 아니다. 우정을 나누며 끈끈하게 뭉쳐 희망을 꿈꾸는 아이들의 이야기다"라고 설명했다.

김중미는 1987년 괭이부리말에서 공부방 운영을 시작했고, 10년이 넘는 이곳의 생활이 고스란히 '괭이부리말 아이들'에 담겼다. 김중미는 "소설 속 인물의 모델은 없다. 그동안 공부방에서 만난 아이들의 인상 깊었던 부분이 기억으로 쌓여 만들어 낸 인물들이다"라고 밝혔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전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된 건 동화 작가 권정생의 말대로 '참으로 성실하게 씌어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 '행복'의 개념을 색다르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세태는 가진 것이 많을수록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래 인용하는 두 대목에서는 '괭이부리말의 행복'이 유난히 도드라진다.

이제 겨우 열흘밖에 함께 살지 않았지만 동준이는 영호 삼촌이 어머니보다도, 아버지보다도 가깝게 느껴졌다.

자다가 영호 삼촌의 통나무같은 굵고 무거운 다리에 깔려 숨이 막힐 때도 있고 발로 차여 아래턱이 얼얼할 때도 있었지만, 길고 긴 밤을 함께 지낼 사람이 있다는 게 그저 좋았다. 어쩌다 영호 삼촌이 먼저 잠들어 코고는 소리가 요란할 때도 그 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렸다.

새벽부터 영호네 집이 북적북적댔다. 김장을 하는 날이다. 배추를 씻고 양념 준비를 마치자, 명희와 명환이는 숙자 어머니를 도와 배추 속을 넣고, 동수와 영호는 김장독에 배추 넣는 일을 맡았다.

숙자, 숙희, 동준이는 잔심부름을 맡았다. (…중략…) 숙자와 숙희는 동수, 동준이, 명환이와 섞여 있을 때 가장 밝았다.

숙자 어머니는 많은 형제 속에 어울려 살던 어린 시절이 자꾸만 떠올랐다. 가난하지만 형제들 틈에 섞여 있어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숙자 어머니는 숙자와 숙희가 이렇게 어울릴 곳이 있는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괭이부리말은 제물포 개항과 동시에 몰려든 외국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이들이 옮겨와 갯벌을 메우고 살면서 동네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황해도 사람들이 피란을 왔고, 1960~1970대는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온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시기는 다르지만 100년의 세월을 그렇게 모두가 빈손으로 쫓겨나오다시피한 끝에 찾아든 땅이 괭이부리말이다.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올라온 이농민들은 돈도 없고 마땅한 기술도 없어 괭이부리말 같은 빈민 지역에 둥지를 틀었다.

판잣집이라도 얻을 돈이 있는 사람은 다행이었지만, 그나마 전셋돈마저 없는 사람들은 괭이부리말 구석에 손바닥만한 빈 땅이라도 있으면 미군부대에서 나온 루핑이라는 종이와 판자를 가지고 손수 집을 지었다. (…중략…) 이렇게 괭이부리말은 어디선가 떠밀려 온 사람들의 마을이 되었다.

오게 된 까닭은 모두 달랐지만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서로 형제처럼 지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 보금자리를 만들어 갔다.

괭이부리말에는 이처럼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의 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 괭이부리말을 지난 3일 찾았다. 최근들어 보이는 가장 큰 변화는 가구 수다. 한때 500가구가 넘게 살았던 괭이부리말 쪽방촌에는 이제 280여 가구만이 남았다.

인천시가 2011년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시작하면서 괭이부리말을 떠나는 사람들은 빠르게 늘었다. 남은 사람 대부분은 60대 이상의 노인이다.

이음분(74) 씨는 53년째 괭이부리말에 살고 있다. 21세에 결혼을 하면서 와서 한 번도 괭이부리말을 떠난 적이 없다. 자식들은 결혼해 나가고,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정이 들어 동네를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이씨는 "집에 화장실도, 수도관도 없어서 물도 한 통에 2원씩 주고 사다 먹을 때가 있었어. 빨래도 판유리공장에서 깨끗한 물을 내보내는 호스를 찾아 했을 정도였고. 그렇게 어렵게 살았는데도 이웃끼리 잘 어울렸어. 애들도 가끔 그때를 이야기 해. 생활이 팍팍하니 더 기억이 나는거지. 나는 정이 들어서 죽을 때까지 딴 데는 못 가"라고 말했다.

김연옥(81) 씨의 괭이부리말 애착도 굉장하다. 김씨는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라 서로 사정을 뻔히 잘 알았어. 누구네 생일이다 하면 형편에 맞게 계란 한 꾸러미, 국수 한 줌, 부침개 한 판 등을 마련해 모여 나눠먹고 노래도 부르고 그랬어. 힘들기야 말로 할 수 없을 때지만 참 재미있게들 살았지. 지금도 이웃끼리 그리 지낸다"고 했다.

이음분, 김연옥 씨의 얘기는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 동네에도 주거환경개선사업 바람이 불어, 지난해 12월 임대아파트가 들어섰다. 만석감리교회 인근에 있는 윗동네의 임대주택은 쪽방들을 헐고 올린 새 집이다. 집의 모양은 이전과 다르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예전 그대로다.

채종화(80) 씨는 "아랫동네에 살다가 임대주택으로 들어왔어. 집만 옮겼지 뭐 동네가 바뀐 건 아니니까. 요즘에도 위 아래 오르락내리락 하며 지내. 동네 할머니들이랑 손자·손녀도 본다"고 했다.

마침 지나던 두 동의 임대아파트 사이에 있는 정자에서는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과 고학년 심지어 중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놀았다.

눈에 띄게 멋들어진 장난감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럴듯한 놀이기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두가 내 집처럼 신발을 벗고 정자 위, 아래를 뛰어다녔고, 여학생들은 수다를 떨며 요요 던지기에 빠져 있었다. 혼자가 익숙한 요즘의 또래 아이들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김윤식(61) 만석초등학교 교장은 "다른 학교보다 복지 대상이 2배 정도 많다.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사는 조손가정의 아이들도 적지 않다"며 "우리 학교 아이들을 보면 내 어릴 적 생각이 난다. 같은 동네에 살면 자연스럽게 형, 누나, 언니, 동생이 되어 가족처럼 지내는 모습이 참 따뜻하다.

어울려 살아 그런지 심성도 착하다. 쳇바퀴 돌듯 학교, 학원을 도는 아이들보다는 자율적으로 어울려 공부하고 뛰노는 쪽이 많다"고 말했다.

/글 = 박석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