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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제대후 노동현장 뛰어들어
두번째 시집 '대열' 투쟁의지 드러내고
탄압 속 '노동이 세상 움직인다' 외쳐
민예총·민족문학작가회의 지회 설립 앞장
2006년 병으로 안타깝게 세상 떠나
"박영근은 인천이 꼭 기억해야할 작가"
기름밥 세월 이십 년짜리 구닥다리 안전등도 없는 프레스란 놈. 개눈깔을 달았는지 제 멋대로 내려앉아 덜컥 손가락이 잡혔는데…. 병신이 된 것도 억울한데 이게 또 무엇이냐 죽일 놈들 일이 없으니 회사를 떠나라네….
노동시인 박영근(1958~2006)의 두 번째 시집 '대열'에 실린 '여우발'의 일부다. 산재보상도 제대로 못받는 노동자의 하소연이 마음을 울린다. 그의 시 대부분이 이렇다. 박영근은 노동자 탄압이 극심하던 1970~80년대 공돌이·공순이가 돼 그들의 목소리를 시로 옮겼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박영근은 전주고등학교 1학년 열여섯 나이에 "억압적인 학교생활이 더 이상 필요없다"며 자퇴했다. 이후 혼자 서울로 올라가 영등포 신정동 뚝방촌 단칸방에 살면서 혼자 책을 읽고, 글쓰기를 읽혔다. 이때 박영근은 김지하, 고은, 황석영 작품에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
지식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스무 살 무렵 인천에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를 만나면서 가슴 속 뜨거운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1978년 인천은 동일방직 똥물투척 사건을 계기로 노동계, 종교계, 학생들이 한데 뭉쳐 회사와 국가의 조직적인 노동탄압에 저항하던 시기였다. 박영근은 2004년 쓴 시평집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에서 당시를 이같이 회상했다.
하인천 만석동에 있는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을 만날 무렵이었다. 거기서 그들의 일기며 투쟁일지와 '객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등의 나의 서투른 문학적 체험과 지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 뜨거움 만큼 나는 늘 막막했다. 도대체 내가 그들에게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책을 읽은 자의 무력감과 부끄러움 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나는 노동자가 되었고, 급진적 운동이 시작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박영근은 군 제대 후 1981년 '반시(反詩)' 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듬해 구로공단 가구공장에 취업해 노동현장에 직접 뛰어들었다. 그리고 1984년 첫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를 냈다.
그는 이 시집을 "돌아보면 스스로에게도 가혹할 만큼 잘못 살아온 한 사내가 때때로 허기진 마음의 눈물 같은 것을 뿌리치면서 기대어 보았던 작은 불빛들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이 작은 불빛은 그의 두 번째 시집 '대열'(1987)에서 불꽃으로 변해 활활 타올랐다. 무언가와 한바탕 싸워보려는 듯한 의지가 시집 전체에 담겼다.
'대열'은 서정성이 가미된 첫 시집과 달리 마치 노동자의 수기형식이다. 기댈 곳 없는 노동자들의 삶이 너무 구체적이다. 그래서 더욱 절망적이다.
노동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힌 남자가 아내와 주고 받는 편지가 그러하고, 제멋대로 철야 명단을 작성해 위에 올리고, 생산량 어쩌구 사장님 말씀 어쩌구 짖어대는 계장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밤 늦게 일을 마치고 노동자끼리 '소주 한잔' 하면서 늘어놓은 푸념이 문학이 됐다.
박영근 기념사업회 대표인 문학평론가 김이구 씨는 "80년대 박영근의 시는 이야기 형식의 '담시(談詩)'다"라며 "기교를 최대한 배제한 '난장판의 시정 잡설'이 그의 시 세계였다"라고 했다.
1986년 8월 인천 경동산업 파업 농성 중 회사에서 작성한 해고자와 위장취업자 1천662명의 블랙리스트가 발견됐다. 블랙리스트라는 꼬리표가 달리면 다른 회사에 취업하기도 어려웠다. 박영근의 작품은 이 같은 시대상을 군더더기 없이 그대로 시에 담았다.
너희가 누구 팔아서/좆나발 불고 있는데/멀쩡한 청춘 위에/블랙리스트 말뚝을 박아/병신을 만들겠다는거냐/죄인을 만들겠다는거냐/너희가 누구 팔아서/꽃세상 살고 있는데…(중략)… 다시 돌아올 때는/머리 수그리고 납작 엎디어/노동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야/그게 아니야/빼앗긴 우리들 노동의 땅에/깃발을 세우러 올거야 -'농성장의 밤2'
박영근은 이런 현실에서도 노동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세상에 알렸다. 금, 은, 기계, 자동차, 빌딩, 석탄, 옷, 종이, 나사 한 개, 수돗물 한 방울 좌우간 세상의 모든 것은 돈 많은 사장이나 힘 좋은 장군이 아닌 '우리 노동자'들이 만들어 간다고 시에 썼다.

우리가 노동으로 일군 세상/일제 때 호남쌀 눈물 구슬프던 군산 부두/미곡선 하역부 목도꾼 할애비로부터/할애비로부터/양키 군대 설치던 군정시절/아우성 끓던 경성 철도 노동자/해방노래 부르다 총맞아 죽은 애비로부터/애비로부터/주물에 썩어가는 십년 노동자 이내 몸까지/이내 몸까지/뼈골 박아 일군 세상 -'겨울밤 학습'
내 나이 열 다섯부터 공장엘 나갔지/나는 언제나 부끄러움에 젖어/노동자라는 내 이름/숨겼다네//언제부터였나/스무살 방직공장 시절이었지/다정한 언니들을 따라 지친 마음 녹여줄 /사랑을 찾아다녔네/아아 억압도 눈물도 없는 곳//친구야, 가난한 노동자들의 집에서 나는 배웠다네/노동자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이제는 노동자라는 내 이름/감출 이유가 없어졌다네//싸움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모진 비바람 몰려올수록/노동자라는 내 이름/세상에서 가장 당당하게 빛난다네-'노동자'
하지만, '개털 같은 임금' 10% 올려받자 했더니, 없는 놈들이 단결하면 나라가 불안해 진단다. 노동여건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한들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반영하는 것이 기업의 존폐와 직결된다"는 오늘날 기업의 논리는 그때와 다를 바 없다.
'노동고용부'가 아닌 '고용노동부'는 그 의도가 어찌됐든 노동자보다 고용주를 중시한다는 사회 풍토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리라. 정부가 안전을 중시한다면서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개칭한 것처럼 말이다.
1990년대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동지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박영근의 작품세계도 변화를 맞는다. 꿈꾸던 세상으로의 변혁이 희박해지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그는 비로소 자기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는데 더 집중했다. 큰 일을 치르고 난 뒤의 '후일담' 같은 얘기였다.
1990년대 초 여름의 어느 해일 것인데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그 무렵 나는 인천 부평 산곡동의 유난히 샛골목이 많고 월세짜리 단칸방이 흔한 공단마을의 무력한 기식자였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활동가라고 불리던 '정치적 인물들'은 말 그대로 썰물처럼 공단과 그 주변을 빠져나간 뒤였고, 전망은 어떤 주석도 달지 못한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
차체부 이십년, 공장의 불빛은 지척인데/웬일로 친구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얼굴을 가리고 있는 저 거대한 담벽/그 너머 어두운 소문으로 몰려와 나를 부르는 소리//길 위에 내 몸을 눕힐 수 있는 곳/천막 농성장엔 아내가 있을 게다//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다-'길 위에서'
그럼에도 박영근은 꾸준히 노동과 현실을 다룬 작품을 발표하고 1994년 제12회 신동엽 창작상을 수상하면서 그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1995년 인천 민예총을 창립하는데 앞장섰고, 1998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를 설립할 때는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2003년엔 다섯 번째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로 제5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쓰러진 동료를 안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그린 '대열'의 표지(판화)를 비롯한 박영근 시집의 표지 그림과 디자인은 그의 부인이자 노동미술 작가인 성효숙(56) 씨가 도맡았다.
말년에 잠시 헤어져 산 적이 있지만, 성효숙 씨는 기념사업회를 통해 박영근 삶의 흔적을 복원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부평에 세워진 시비의 글씨도 성효숙 씨가 박영근의 육필을 한 글자 한 글자 따와 새긴 것이다.
박영근은 2005년 11월 정들었던 부평을 떠나 인천 용현동으로 이사했다. 술은 원래부터 좋아했지만, 삼시세끼를 술로 때우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5월 11일 오후 8시 40분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평론가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가장 젊은 시절, 예민한 시기에 노동운동의 메카였던 인천의 노동현장을 전전하며 시를 썼기 때문에 박영근은 인천이 꼭 기억해야할 중요한 작가다"라고 말했다.
다시는 펜을 들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을까. 생을 마감하기 직전 '리토피아' 2006년 봄호에 쓴 그의 마지막 시 '이사'는 박영근이 박영근에게 쓴 시다. 박영근은 이제 없지만, 그 자리에서 오늘날 노동의 현실과 노동자의 외침을 시에 담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김명인 교수는 이 시를 추천하면서 "박영근이 탈혼(脫魂)해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쓴 작품"이라고 했다.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더듬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 잔의 커피와,/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중략)…때로 그 길을 걸어 그가 올지도 모른다 밤새 얼어붙은 수도꼭지를/팔팔 끓는 물로 녹이고 혼자서 웃음 터트리는/그런 모습으로 찾아와 짠지에 라면을 끓이고/소주잔을 흔들면서 몇 편의 시를 읽을지도 모른다/도시의 가난한 겨울밤은 눈벌판도 없는데/그 사내는 홀로 눈을 맞으며/천천히 벌판을 질러갈 것이다.
/글 = 김민재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