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소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고영근(1853~1923)으로 구한말 개화파 일원으로 지금의 군사령관격인 종2품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1895) 당시 일본 낭인과 결탁해 궁궐문을 열어준 조선훈련대 제3대대장 우범선(1857~1903)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끝까지 추적해 일본 현지에서 척살했다.
고영근은 이 일로 일본에서 체포돼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고종 황제의 청원으로 사면돼 5년을 복역한 뒤 귀국했다. 이후 고종 황제 부부가 합장된 홍릉을 훼손하려던 일제의 손길로 부터 능을 지키다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정확한 묘소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묘소에 대한 문헌도 많지 않다.
월간지 신동아는 2009년 9월에 '1925년 일본 초센신문사의 곤도 시로스케가 쓴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에 (고영근이) 금곡(현 남양주 금곡동)속에 초가집을 짓고, 무관(無冠)의 참봉으로 만년을 보내다 죽자 그의 유골을 태왕(고종) 능 밑에 묻었다라는 내용이 있다'고 보도했다.
또 동아일보(1937년 1월 30일자)는 '최초 서울 불광동에 매장됐으나 일제시대 도시계획으로 인해 수원으로 이장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전했다.
남양주 홍릉의 향토해설사 A(여)씨는 문헌 조사와 소문을 추적한 결과, 최근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야산에 위치한 묘소가 고영근의 것으로 확신하고 이같은 사실을 수원 향토역사계에 전파했다.
염상균 수원화성연구소장은 "묘석에 그의 이름과 행적이 기록돼 있고 선생의 후손들이 묘를 돌보고 있다는 마을 주민의 증언을 들었다"며 "고영근 묘소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는 "선생의 충정을 기리고 묘가 보존돼야 하는데 안타깝다"며 "정부와 지자체 차원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수원시도 이같은 소식을 접하고 고영근의 항일 행적과 묘소에 대한 조사를 준비중이다. 수원시 이동근 학예연구사는 "고영근의 묘소와 공훈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면서 "모두 사실로 입증되면 독립유공자로 건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친일파 우범선의 아들은 육종학자로 잘 알려진 우장춘 박사로 우 박사는 부친의 친일 행적에 대한 죄책감을 씻기위해 귀국한 뒤 한국 농업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유은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