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했던 옛날의 영화는 어디가고 빈터와 자취만 남아있으나
산과 물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그 시절을 되짚어 보게 하는구나

회암사지 터, 골짜기·규봉 등 아쉬워
양주관아지, 좋은 터의 기본… 시청 위치했다면 좋았을 것
장흥 자리한 권율장군묘, 좋은 맥 타고 당당하게 조성 '감탄'


서울의 북쪽, 경기도의 중북부에 자리한 양주시는 인구 20만이 조금 넘는 크지 않은 도시다. 요즘에는 서울 북쪽의 한적한 위성도시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양주는 경기북부지역의 '맏형' 같은 존재였다.

사실 양주가 중소도시가 된 것은 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것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삼국시대부터 경기 북부와 남부를 잇는 군사와 교통·교역의 요충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양주(楊州)라는 지명도 '고려 초기 문종 때 서울이 될 만한 역사적 배경과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 하여 '양주'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니, 경기북부의 자존심으로 꼽힐 만하다.

이런 역사에 걸맞게 양주시에는 굵직굵직한 유적지와 묘역 등이 곳곳에 자리해 있다. 취재팀은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최대 국찰로 왕실의 사랑을 받다가 사라진 회암사지(檜巖寺址, 사적 제128호)를 먼저 찾았다.

회암사지는 인도의 승려 지공과 그의 제자인 나옹, 그리고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의 이야기가 얽힌 역사의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다.

특히 당대 최고의 명승이었던 지공이 고려를 찾았을때 "산수 형세가 완연히 천축국 아란타절과 같다"고 하였고, 이후 원나라까지 찾아와 제자가 된 나옹에게 "고려로 돌아가서 삼산양수간(三山兩水間)에 머물면 불법이 크게 일어난다"고 하여 나옹이 회암사 중창에 나서게 했으니, 옛 고승의 안목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나의 절이 있던 곳으로는 정말 규모가 엄청나네요. 풍수에 능했던 옛 고승들께서 고르고 고른 사찰이고, 조선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면 좋은 터에 지어졌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한때 대단한 영화를 누렸던 사찰이 한순간에 사라져 폐허가 됐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풍수적으로 부족함이 있다는 뜻입니다. 정말 좋은 터에 지어졌다면 오래오래 영화가 이어져야겠지요."

드넓은 회암사지 일대를 둘러본 조광 선생은 예상대로 아쉬움을 표시했다.

"우선 주산인 천보산을 볼때 돌이 많고 거친 산이어서 부족함이 많아요. 터가 넓다고 하지만 골짜기가 진 곳이고, 뒤쪽에 자리한 토체와 앞쪽을 두르고 있는 일자문성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주변을 멀리 둘러보아도 유서깊은 절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상사나 토체들이 많이 보이지 않네요. 게다가 뒤쪽으로 풍수에서 좋지 않게 보는 규봉(窺峰)도 보이니, 옛 회암사는 늘 넘보며 해하려는 세력이 있었다고 봐야겠어요. 아마도 큰 절이 한순간에 폐허가 된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나옹이 본격적인 중창에 나선 이래 한때 262칸에 이르는 전각에 3천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남아있을만큼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던 회암사는 명종 21년 실록에 '성난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소문이 돌아 왕이 그들을 타이르도록 명을 내렸다'는 기록을 남긴 후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후 약 30년 후인 선조 28년 실록에는 '회암사 옛터에 큰 종이 있는데 불에 탔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몰락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회암사지는 1997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발굴작업을 통해 옛 건물터들과 수많은 기와, 도자기, 불상 등이 확인됐고, 그로인해 400년 넘게 묻혀있던 옛 모습과 이야기들도 세상의 빛을 보게 됐으니, 회암사지 뒤 천보산의 맥을 타고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를 세운 덕이 아닐까 싶었다.

회암사지를 내려와 새로 지어진 박물관을 둘러본 취재팀은 유양동의 양주관아지(경기도기념물 제167호)를 찾았다. 이곳은 중종 1년(1506년)때 관아가 설치된 이래 417년간이나 양주목을 관할했던 행정의 중심지였다.

이후 양주관아는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1922년에 시둔면(현 의정부시 의정부동)으로 이전하였고, 이곳에 남아있던 관아 건물들은 한국전쟁때 파괴돼 옛 모습을 잃었다고 한다. 현재는 옛 동헌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동헌 건물 한동만 복원돼 썰렁했지만, 조광 선생은 주위를 둘러보며 환한 웃음을 전했다.

"이곳은 우리 선조들이 좋은 터를 잡는 기본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불곡산에서 이어진 부드러운 산자락 앞에 푸근하게 안겨있는데다가, 앞쪽으로 일자문성이 뚜렷하게 자리해 있어요. 멀리 오른쪽으로도 일자문성과 토체가 보이고, 왼쪽으로도 멀리 영상사와 토체가 자리해 있어요. 특히 양주 일대가 산이 험한 편인데, 이곳에서 보이는 산들은 부드러우면서도 모양이 좋아요. 관아터 뿐 아니라 그 옆에 자리잡은 양주별산대놀이마당이나 양주향교 일대가 아늑하고 푸근한 것이 풍수적으로 좋은 자리라고 할 수 있겠어요."

양주관아가 좋은 자리에 있어서 양주목사들도 선정을 많이 베풀었는지, 관아지 한쪽에 10여기의 송덕비들이 줄지어 서 있다. 조광 선생은 "풍수적으로만 본다면 이곳에 시청이 왔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빈터로 남아있는 현재의 상황을 아쉬워했다.

양주관아지를 나서 이번에는 멀리 남서쪽 장흥면에 자리한 권율장군묘(경기도기념물 제2호)를 찾았다.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장흥면은 장흥관광지와 송추계곡으로 수도권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권율장군묘는 장흥관광지 안쪽으로 자리해 있어서 미술관과 조각공원, 카페 등이 즐비한 관광지를 구경하며 지나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을 지나면서 곧바로 한눈에 보이는 권율장군묘는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명장의 명성에 걸맞게 넓은 묘역이 잘 정돈돼 있다.

"지금이야 관광지가 조성돼 번잡하지만 옛날 이곳에 묘를 쓸 때는 첩첩산중이었을텐데 어떻게 이런 좋은 자리를 찾아 썼는지 참 신기하기도 해요. 한눈에 보기에도 좋은 맥을 타고 당당하게 조성된 묘가 감탄스럽네요."

바닥에서 보기에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한 권율장군의 묘역에 올라 앞과 좌우를 바라보니 기운찬 산들이 주위를 겹겹이 감싸고 있다. 특히 오른쪽에 자리한 거대한 영상사는 안동권씨 가문의 위세를 대변하는 듯하다.

영상사에서 뻗어나와 크게 감싸고 돌아들어오는 외백호가 일품인데, 그 바깥쪽으로 멀리 또 잘생긴 영상사가 자리해 있다. 좌청룡 또한 묘 앞쪽까지 선명하게 뻗어있고, 그 바깥으로 외청룡이 감싸고 돈다.

외청룡 너머로는 멀리 영상사와 일자문성이 듬직하게 보이고, 발 아래로 눈을 돌리면 장흥계곡의 물이 돌아 지나가면서 좋은 음택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했다.

/글=박상일기자
사진=김종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