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5공단 '세창물산 여공들' 파업 이야기
학생신분 감추고 노동자로 살때 소재 얻어
송철순 추락사 계기… 노동계 전체로 확산
위장폐업 이어 산업체 학생 노조탈퇴 종용
1989년 2월 구속될 각오로 결의 '새벽출정'
문제 심각성 알리고 노동운동 활성화 불씨


1980년대 후반까지 인천 주안5공단에 있던 세창물산 여공들은 깡다구가 세다고 해서 '깡순이'라고 불렸다.

김깡순, 이깡순, 박깡순 식이었고 "저기 깡순이 지나간다"고들 했다. '창작과 비평' 1989년 봄호에 실린 방현석의 노동소설 '새벽출정'은 세창물산 깡순이의 투쟁일기다.

소설은 1988년 노조를 설립하고 임금과 근로조건을 개선해 달라며 투쟁하던 중 사고로 숨진 '송깡순' 송철순과 회사의 위장폐업에 맞선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도자기 인형 생산·수출업체인 세창물산 작업 현장은 시너, 석유 등 각종 유해물질투성이였지만, 환풍시설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가스 가마의 뜨거운 열기에도 선풍기 없이 근무하는 열악한 조건이었다.

하루 평균 11시간의 노동, 거듭되는 피로에 쌓일대로 쌓인 감정들과 지치고 야위어가는 몸. 신경은 점점 더 예민해져 가 칼날처럼 날카로워지고 졸립고 피곤한 몸은 자판기의 130원짜리 질 낮은 커피로 일으켜 세우고 거듭 쌓이는 노동의 피로로 몸은 썩어들어가는 듯하다.

이 세창물산이 소설에서는 '세광물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난 5일 소설 속 노조위원장 '미정'의 실제 인물 원미정(53·여) 전 인천시의원(현 부평문화재단 이사)을 만났다. 10년 전 정치판을 떠난 이후 세창물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란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 세창물산에서도 파업이 일어났어요. 믿어지지 않겠지만, 당시 요구조건 중 하나가 '쌀밥을 달라'는 것이었는데, 밥은 죄다 시커먼 밥(잡곡)에 오징어국은 '오징어가 지나간 국'이었죠."

1988년 6월 세창물산에 노조가 만들어졌다. 노조 설립은 역설적이게도 전체직원 300명 중 50명에 불과했던 남성 노동자들이 주도했다. 남자와 여자의 급여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남자들의 남녀차별적인 발상에서 시작된 파업이 오히려 여성노동운동으로 발전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세창물산 임금은 초임 일당이 남자 4천400원, 여자 4천300원, 학생 3천770원이었다. 그때 담배 '88라이트'가 한 갑에 600원이었으니, 남자들은 담배 한 갑에 밥 두끼 사먹으면 끝나는 돈이었다는게 원 씨의 설명이다.

고용노동부 통계를 보면 2013년 기준 1년차 제조업 근로자의 남자 평균 임금은 월 216만원, 여자는 월 160만원이었다. 요즘에도 남녀 차이가 크다.

세창물산 근로자들이 당시 최저생계비를 기준으로 임금인상액을 산정했더니 1천700원이나 올려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만큼 세창물산 노동자들의 삶이 비참했다. 노동자의 당연한 요구를 회사는 거부했고 깡순이들은 6월 28일 파업에 들어간 뒤 원씨를 위원장으로 한 노조를 설립했다.

방현석이 새벽출정의 배경이 된 세창물산을 알게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86년 중앙대 문창과 학생 신분을 속이고 인천에서 노동자가 된 방현석은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인노협) 조직국장으로 일하면서 세창물산 투쟁을 지원했다. 그가 세창물산 파업을 도우면서 여공들을 대신해 쓴 유인물은 소설의 소재가 됐다.

파업기금 마련을 위한 집회 전날 노조 사무장 송철순은 해가 질 무렵 현수막을 걸기 위해 공장 2층 옥상에 올라갔다. '사장놈이 배짱이면 노동자님은 깡다귀다'라는 현수막을 걸고, 두 번째 현수막을 걸던 순간 공장 슬레이트 지붕이 주저 앉으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머리를 다친 철순은 이틀 뒤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1988년 7월 17일 밤 9시45분, 마지막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철순은 스물여섯의 나이로 한많은 노동자의 삶을 마감하였다. 그녀가 떨어지는 순간까지 한끝을 놓지 않았던, 끝내 걸지 못한 현수막만이 뚫어진 지붕에 늘어쳐진 채 유언을 대신했다. '노동자의 서러움 투쟁으로 끝장내자!'

철순의 죽음으로 세창물산의 싸움은 인천 노동계 전체의 싸움으로 확산됐다.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장례식장에 방문해 힘을 보탰고, 집회를 위한 장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 결국 이들의 파업은 임금 1천400원 인상으로 마무리 되는 듯했다.

하지만, 회사는 임금 인상으로 회사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철순의 49재 추모제 행사가 있던 날 공장 문을 닫아버렸다. 위장폐업이었다.

세창물산 깡순이들은 다시 공장에 모여 길고 긴 농성을 이어갔다. 비슷한 시기 인천에서는 세창물산뿐 아니라 신립섬유, 삼효정공 등 공장들이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폐업을 선택했다. 1988년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그 해 노사분규로 폐업한 회사 25곳 중 6곳이 인천지역 회사였다.

농성이 장기화되자 힘 없는 산업체 학생들에 대한 공격이 들어왔다. 당시만해도 인천여상, 예화여상, 한진실업학교, 문성여상 등 산업체 학교는 지방의 가난한 학생을 데려와 밤에는 공부를 하고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 수 있게 해줬다. 세창물산에도 여공 200명 중 80명이 이 같은 산업체 학생들이었다.

회사와 학교 측은 산업체 학생을 투쟁현장에서 이탈시키는데 집중했다. 이에 맞선 언니 깡순이들은 월급이 끊긴 동생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 전세방 보증금을 빼기도 하고, 결혼적금을 깨기도 했다.

농성에 참여한 산업체 야간학생들은 매일같이 교무실에 불려다녔다. 농성이탈과 노조탈퇴를 종용받지 않은 조합원은 없었다. 수업시간에도 세광 조합원들만 지적당했고, 수모를 겪었다. "하라는 공부나 잘해. 그렇게 해서 언제 공순이 신세를 면할래."

인천시교육청에 따르면 이들 산업체 학교는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각각 특성화고등학교나 학력인정 고등학교 등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낮에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은 없다.

세창물산 깡순이들은 지금의 동구 현대제철·서구 가좌분뇨처리장에서 인천교를 거쳐 주안5·6공단으로 이어지는 갯골인 '똥바다'에서 갈매기를 보며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똥바다에 머무는 갈매기 꼴이 꼭 자신들과 닮았다고 본 것이다. 지금 똥바다는 모두 매립돼 사라졌고, 세창물산 자리에는 다른 공장이 들어섰다.

"저 갈매기들은 뭘 먹고 살까."

"똥바다엔 물고기도 살지 않을 텐데, 식당에서 버린 짬밥을 먹고 살까."

"저 갈매기들은 아마 썰물을 따라 나가면 드넓은 바다가 열린다는 걸 모를 거야. 노동자의 운명은 가난과 굴욕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처럼 똥바다가 바다의 전부라고 생각할거야."

그래도 멀리 바다가 있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길고 긴 투쟁을 통해 세상엔 모순이 많다는 걸 알았고, 싸움을 통해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1989년 2월 20일 새벽 세창물산 깡순이들은 촛불에 불을 붙이고 '부모님 전상서'와 혈서를 썼다. 모두 구속될 각오를 하고 결의를 한 것이다.

소설 제목 '새벽출정'이 있던 날이다. 이들은 이날부터 인천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다 급기야 3월 16일 국회 노동위원회 이강희(민정당·인천 남구을) 의원 여의도 사무실을 점거했고, 이 사태로 원 씨 등 4명이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됐다.

이들의 투쟁이 결국 세창물산의 공장 재가동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위장폐업 인정, 일간지 공개 사과문 게재, 파업기간 8개월분 평균임금 전액과 해고수당 6개월분 지급, 244일간의 파업비용 전액지급 합의를 이뤄냈다.

세창물산 노조의 투쟁은 무엇보다 위장폐업의 심각성을 전국적으로 알렸고, 인천지역 노조 연대투쟁과 신규 노조 결성을 위한 거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소위 '학출'(학생 출신 노동자)의 개입 없이 노동자 스스로 '민주노조'를 결성한 것도 큰 의미였다.

특히, 해고수당의 30%인 2천700만원을 지역 노조기금으로 내놓은 것은 인노협 사무실이 월세에서 전세로 옮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인천지역 노동운동의 활성화로 이어졌다.

조성혜 전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은 "세창물산 노조는 투쟁과정에서도 조합원들의 의견과 힘을 잘 결집해 낸 가장 민주적인 노조였다"며 "투쟁의 목표나 실천방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를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움직여 단결의 힘이 매우 강한 노동조합이었다"고 했다.

작가 방현석이 말하는 세창물산 노동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방현석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며 "그 시대 최악의 조건에서 최상의 희망을 갖고 싸웠던 사람들이 나를 감명시켰고, 그 이야기를 소설로 쓰게 됐다"고 말했다.

글 = 김민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