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진혼제·교육 등 민주화운동 적극지원
인천기계공고 4·19 학생의거 기념탑 뜻 기려
동인천·부평역광장서 집회·시위 주요 결집


인천에서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장소는 부평, 남구 주안일대, 중·동구 지역이다. 부평은 1960년대 초반부터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됐고, 전기전자 부품 등 각종 기계업종 산업이 자리잡았다.

또 자동차공장과 같은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면서 노동자의 도시가 됐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했고, 저임금 노동착취에 반발한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나가기 일쑤였다.

주안도 상황은 비슷했다. 남구 주안동에서 서구 가좌동으로 이어진 주안공단은 1970년대 염전을 메워 만든 산업단지였다. 1980년대까지 국가 산업화를 주도하는 핵심 지역이었지만, 노동자에 대한 대우는 비참했다.

중·동구는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전국의 노동자들이 몰려든 곳이다. 1960~70년대 동일방직(옛 동양방적)과 인천중공업 등이 동구 만석동 일대에 설립되면서 대규모 노동자가 유입됐고, 중·동구는 노동자들의 고달픈 생활터전이었다. 산업선교회가 동구에 자리잡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부평권

#부평역광장


부평역광장은 인천지역 민주화·노동운동의 주된 집회·시위의 현장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등 전국단위 민주화투쟁 당시 인천의 대표적인 대중집회 및 시위 공간이었다. 또 대우자동차를 비롯한 부평공단 노동자들이 결집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결성 보고대회와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발족식이 진행되었던 장소가 바로 부평역 광장이었다.

#부평1동 성당

부평1동 성당은 민주화투쟁 열사의 추모미사 및 진혼제, 참교육 학부모 결성 등 인천지역 민주화운동의 주요한 활동 거점과 노동자들을 위한 모임 공간으로 역할했다.

김병상 신부와 호인수 신부가 부임하면서부터는 지역현안인 선인재단 비리 문제와 시립화 작업, 계양산 개발 반대,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 등 지역의 주요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산곡동 천주교회

산곡동 천주교회는 1980~90년대 대우자동차, 한국 베어링, 부평4공단 일대 노동자들의 교육 및 상담, 투쟁장소로 사용됐다.

2001년 대우자동차 해외 매각과 관련해 성당 내부에 노동조합이 집행부를 두고 치열하게 투쟁했던 곳이다. 당시 경찰이 성당에 난입해 노동자들을 연행하면서 사제복을 입고 있던 신부를 폭행하기도 했다.

#청천동 영아다방

영아다방은 인천지역 민주화 운동가들의 모임 및 만남장소로 자주 활용됐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영아다방 사거리에서 퇴근하던 수 만명의 노동자들이 '노동3권 쟁취', '민주노조 결성', '잔업철폐', '임금인상' 등을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진행하기도 했다. 지금은 'John179'라는 커피 전문점으로 바뀌었다.

#백마교회

백마교회는 1974년 도시산업선교회의 지원으로 설립된 교회다. 삼원섬유의 유동우를 비롯한 수많은 노조 활동가가 이곳에서 배출됐다. 사랑방교회, 해인교회, 샘터교회 등과 더불어 인천지역 초기 민중교회로서 성장해 나갔다.

1980년대 중반에는 주말마다 문화행사가 열릴 정도로 지역 노동자들의 활동 근거지나 문화공간으로 역할을 했다.

■주안권

#옛 시민회관 쉼터


1986년 5월 3일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이 열리던 날 지금의 옛 시민회관 쉼터 자리에서 인천지역 노동자, 시민, 학생 수 만명이 모여 군사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주안역 방향과 석바위 방향 거리는 시민들의 물결로 가득 찼다. 당시 현장에서 연행된 인원은 400여명으로 이중 130명이 소요죄와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주안5동 성당

주안5동 성당은 '염전본당'으로 출발해 1980년대 공단 조성과정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1987년 미사, 야간고등학교, 무료진료활동, 법률상담 등 주안공단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또 성당 근처의 상록수서점은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노동자들의 정보 교류의 장이 됐다.

이같은 활동의 중심에는 부평1동 성당에 있을 때부터 지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적극 지원했던 호인수 신부가 있기에 가능했다.

#주안노동사목위원회

주안노동사목은 주안역 북부 공단 입구 주택가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인천노동자문학회 활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주안노동사목은 '내일을 여는 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고 '골목집'으로 불리기도 했다.

1987년 6월에는 놀이패 '신바람'의 연극 등 노동자 및 민주인사들의 문화공간으로 많이 활용됐다. 지금은 부천, 부평, 주안 등지의 노동사목이 하나로 통합돼 부평 십정동에 위치한 '노동자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인천기계공고 4·19학생의거 기념탑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 규탄시위 당시에는 인천지역 고등학생들도 앞장서 참여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한 탑이 인천기계공고 교정에 있다.

기념탑에는 '젊은 학도들은 겨레의 힘이요 나라의 기둥이다…. 4·19날 인천에서 의거의 횃불을 먼저 높이 밝힌 이가 우리 공고 학생들이라. 이들의 피 끓는 울부짖음은 먼 하늘에 메아리 쳤고….'라고 기록돼 있다.

■중·동구권

#동인천역 광장


동인천역 광장은 인천지역의 민주화 운동에 있어서 부평역과 함께 항상 주요 집회·시위 현장이었다. 주변에 가톨릭회관, 답동성당과 더불어 각종 시민운동단체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어 민주화운동세력의 주요한 결집지 이기도 했다.

1987년 6월 항쟁, 1990년 5월 반민자당 시위사건, 1991년 5월 투쟁 등이 이곳에서 펼쳐졌다.

#답동성당(가톨릭회관)

답동성당은 인천지역 민주화운동사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답동성당 성직자가 민주화운동의 주체이기도 했고, 기나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인천지역의 주요 투쟁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했다.

1970년대 유신정권 시절 시노트 신부 강제출국 항의, 동일방직 노동조합 똥물투척 사건, 김병상 신부 유신반대 강론, 박종철 열사 추모미사 등을 거행하기도 했다.

▲구 인천부 청사(현 중구청)

1883년 인천 개항이후 일본 거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일본영사관이 있던 곳으로 이후 인천부 청사로 사용되다 해방 이후부터는 1985년까지 인천시청으로 사용됐다. 지금은 중구청 본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정부수립 직후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위원회 인천지부 사무실로 사용됐고, 4·19 혁명 당시에는 인천의 초·중·고등학생들이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동구 화수동 183에 자리잡은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미국의 선교사 조지 오글이 인천에 정착한 1960년대부터 이후 40년간 지역 주민·노동자들과 함께 했다. 특히 동일방직, 인천중공업 등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많은 활동을 전개했다.

/김민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