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주민들 궁궐 건설 등 부역 동원
인구 폭발적으로 늘자 식량·주택난까지…
무신정권, 백성 고초에도 권위과시 바빠
불교행사 165차례·연회 24차례나 기록
이 기간 팔만대장경이나 금속활자 같은 민족문화의 정수가 강화에서 생산됐고 고려의 문학과 사상, 예술이 강화에서 꽃을 피웠다. 강도(江都) 시대라 불린 이 기간 한반도 역사, 문화, 정치, 사회의 중심은 강화였다.
고려 무신정권이 강화로 수도를 옮긴 이유는 크게 두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해전에 약한 몽골과의 싸움에서 난공불락의 요새인 강화의 지리적 특성을 활용,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전략적 측면이 있었다.
또 하나는 고려 무신정권이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화 천도(遷都)를 단행했다는 시각도 있다.
고려는 1196년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오랜 최씨 무신정권의 시대가 시작됐다. 최충헌은 강력한 사병조직을 키워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젊고 유능한 군인은 최씨 정권의 사병이 됐고 늙고 나약한 군인들만 중앙군으로 편입됐다.
최씨 집안은 정권을 유지하고자 사병조직을 양성했는데, 이 때문에 국가는 정작 몽골 등 외세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이 없었다. 고려 지배층이 사실상 정권 유지를 위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면서 전쟁은 장기화 됐고, 몽골은 전국 곳곳에서 약탈, 파괴, 방화 등을 일삼았다.
강화 천도가 공식적으로 논의된 것은 1232년 2월이었다. 1차 여몽전쟁이 끝나고 몽골군이 철수한 직후였다.
그리고 몇 차례 회의를 거쳐 6월 16일 최고 집권자인 최우가 강화 천도를 결정했다. 천도 결정 과정에서 개경 사수를 주장하던 대신들이 참수를 당하는 등 당시 조정 대신 대부분은 최우의 위협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을 뿐 천도에 찬성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1232년 6월 천도가 결정된 후 국왕을 비롯한 왕족, 귀족 등 수십만명의 개경 사람들이 강화도로 이주했고, 이에 따른 궁궐, 관청 주거시설들이 강화도에 속속 들어찼다. 수도를 방비할 대규모 성곽 공사도 이 시기에 진행됐다.
'사람과 잣나무 중 어느 것이 중하냐.' 강도 시기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가 자신의 가원(家園)을 짓기 위해 한겨울에 강화의 많은 나무를 옮겨다 심었는데 부역에 동원됐던 백성들이 얼어 죽거나 물에 빠져 죽는 등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이런 내용의 방이 섬 곳곳에 나붙었다고 한다.
고려의 천도로 강화는 역사의 중심에 서는 일대 변혁을 맞게 됐지만 수도 주민으로서 강화 사람들의 삶은 영광 보다는 아픔이 더 컸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지난 2일 을미년 새해 강화도의 칼바람은 매서웠다. 바닷바람 때문인지 초지대교를 넘어 강화군청이 있는 강화읍내에 들어서자 몸이 더 움츠러들었다. 군청에서 강화읍을 둘러싸고 있는 북산 방향으로 800m 정도 떨어진 곳에 고려 궁궐 터가 있다.
고려궁지는 1964년에 사적 133호로 지정됐지만 고려 궁궐터란 것을 입증할 만한 유적은 전혀 발굴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조선시대 이곳에는 전시 상황에 대비해 왕이 머물 수 있도록 만든 행궁(行宮)을 비롯해 조선 국왕의 영전을 봉안한 장녕전(長寧殿), 만녕정(萬寧殿), 왕립 도서관 격인 외규장각, 강화 유수의 집무실인 유수부 동헌 등이 들어섰다.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還都)한 1270년 몽골의 요구에 따라 강화에 있던 모든 궁궐과 성곽이 헐리게 된다.
이후 조선시대 고려궁궐 터에 행궁과 외규장각 등이 들어서면서 현재 고려궁지에서는 고려궁궐 유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인천시립박물관 이희인 유물관리부장은 "1995년 한림대 박물관이 고려궁지 발굴조사를 진행했고, 2008년도엔 겨레문화유산연구원이 발굴 조사를 실시했지만 결론적으로 궁궐터를 입증할 만한 유물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며 "고려궁지 발굴 조사를 제대로 진행하기 위해선 현재 고려궁터에서 조사 범위를 확대 시킬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강화에 세워진 고려의 궁전은 왕이 머무는 본궐(本闕)을 중심으로 강안전(康安殿), 영수전(永壽殿), 경령전(景靈殿) 등 14개의 부속 건물로 구성됐다고 전해지는데 건물의 형태와 이름 모두를 개경의 궁성에서 그대로 따왔다고 한다.
고려궁지를 둘러싸고 있는 강화 북산도 당시 개경에 있던 송악산이란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전쟁의 와중에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도가 된 강화가 겪어야 했던 혼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시 상황에서 강화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주택과 식량의 부족이었을 것이다.
우선 천도 이후 강화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타난 1232년(고려의 강화 천도 시기) 개경 인구는 50만명 가량이다. 개경 사람들이 모두 강화도로 이주하진 않았지만 이 중 15만명 이상이 강화로 이동했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강화사를 연구하고 있는 김형우 강화역사문화연구소장은 "천도 시기 정확하게 강화 인구에 대해 언급된 문헌은 없다"며 "천도 당시 강화는 현 단위의 섬에 불과했지만 수도를 옮긴 후 개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인 15만명 정도가 강화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인구의 폭발적 증가는 강화도에 주택·식량난을 가져왔다.
천도후 강화에서 평생을 보낸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천도 초기의 강화의 주택 건축 상황을 '천도한 새 수도에 날로 더욱 집을 지으니(新京構屋日滋多) 수천의 누에가 다투어 고치를 짓는 듯 하다(猶似千蠶競作 )'고 표현했다.
누에가 고치를 짓듯 많은 집들이 계획없이 들어서다 보니 강화에서는 대형 화재가 많이 발생하기도 했다.
천도후 강화에서는 20여 건의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고 한다. 1234년 1월 궁궐 남쪽마을에서 불이나 민가 수천호가 불에 탔다는 것을 시작으로 천도 초기인 1234년 한해에만 모두 4건의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특히 1245년 3월에는 강화 견자산 북쪽 마을에서 불이 나 민가 800호가 불에 탔고 8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불은 고려 궁궐 일부와 강화 법왕사까지 번져 많은 재산 피해를 낸 것으로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강화도의 식량난은 제일 큰 문제였다. 농토는 한정돼 있는데 10만명이 넘는 이주민이 몰려오다 보니 강화도 사람들의 궁핍한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 고려시대 재상까지 지낸 이규보조차 먹을 것이 없어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인 최우에게 도움을 받았고, 관리들의 녹봉조차 주지 못했을 정도로 식량 사정은 열악했다.
이규보는 '한 그릇 물 마시며 가난을 참아가니(瓢飮自寬聊勉耳) 이제 다시 가짜 안연이 나왔네(從今始有僞顔淵)'라며 강화에서의 곤궁한 삶을 노래하기도 했다. 시에 나온 안연은 공자가 가장 신임하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평생 가난하게 살며 도를 닦은 인물이다.
일반 백성들의 식량난은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강화도의 간척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 최우 등 일부 집정자들은 수시로 불교 행사나 연회를 열며 개경에서의 부유한 삶을 강화에서도 이어갔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강도 시기 연등회, 팔관회 등의 불교 행사가 165차례, 연회는 24차례 열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전쟁 상황에서도 무신 정권은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하며 고려 국왕을 비롯한 문·무신을 지배해 나가는데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강도 시기 고려가 강화에서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강화도의 아픔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고 763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난 1995년 인천은 강화를 품에 안게 된다.
텅빈 고려궁지에서 강화 땅 어딘가에 묻혀 있을 고려궁의 흔적을 더듬더듬 찾아 헤매는 역사가들의 심정으로, 인천의 품에 들어온 강화를 보듬고 그 가치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책임이 현재를 살고 있는 인천 사람들에게 있지는 않을까.
/글 = 김명호기자·사진 = 조재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