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만든 땅、 조상들이 찾은 터를
후손들이 알아보지 못하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네。


백제 수도로 이성산성 역사적가치 불구
난개발 우후죽순 유적지 흔적 찾기조차 힘들어
도심복판 고속도로·송전탑도 氣 흩어놔

경기도의 한가운데, 한강을 끼고 검단산과 남한산 자락이 남쪽을 둘러싼 널찍한 터에 자리를 잡은 하남시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의 선택을 받은 풍요로운 도시다.

지금은 93㎢의 면적에 인구 14만5천명이 사는 중소도시에 머물고 있지만, 1962년에 발견돼 대대적인 발굴이 이뤄진 미사리선사유적지(사적 제269호)에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는 물론 백제시대의 유물까지 쏟아져 나온 것만 보아도 하남시 일대는 예부터 '혜택받은 땅'이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하남시 일대는 백제를 건국한 온조가 하남위례성을 세우고 나라의 기틀을 잡은 중심지로 알려져 있어, 한 나라의 도읍이 되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땅으로 꼽혀왔다.

"하남시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땅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요즘 워낙 많은 변화를 겪은 곳이어서 풍수적으로 어떨지 모르겠네요. 남겨 놓아야 할 곳을 남겨놓고 살릴 것은 살려야 하는데, 대규모로 개발이 되거나 난개발이 되다보면 풍수적으로 중요한 부분들이 잘리거나 사라지게 되는게 보통이에요."

조광 선생은 둘러보기를 시작하면서 의미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이미 몇차례나 취재과정에서 그런 모습들을 보아온 터여서 기대감이 한풀 꺾인다. 취재팀은 우선 하남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이성산성(사적 제422호)을 오르기로 했다. 이성산성은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208m)에 세워진 둘레 1.84㎞의 산성이다.

시가지의 서쪽편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이성산성에 오르면 하남시 동쪽에 우뚝 솟은 하남의 진산(鎭山) 검단산(657m)부터 남쪽으로 이어진 남한산 자락과 하남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음식점들이 모여있는 곳의 뒤쪽으로 돌아가야 만날 수 있는 이성산성 입구에서 산비탈을 조금 오르자 금세 이성산성의 성벽 일부와 커다란 저수지가 눈에 들어온다. 한양대학교박물관을 통해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까지 15년 가까이 걸려 발굴해 놓은 것들이다.

여기서부터 가파른 산비탈을 다시 10분 가량 오르면 이성산성 중심부의 여러 건물지와 동문지를 만난다. 이성산성의 건물지는 일반적인 직사각형의 건물지뿐 아니라 8각·9각·12각 건물지도 포함돼 있어 특이하다.

9각 건물지에서는 인근 주민인듯한 아주머니가 초석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모습을 만났다. 아마도 이들 8각·9각 건물지가 옛날 제를 올리던 건물이었다는 이야기 때문이리라. 9각 건물지를 지나면 눈앞이 훤히 트인 언덕끝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곳이 하남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성산성 동문지(東門址)다.

동문지 성벽 위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멀리 솟은 검단산을 향해 중부고속도로가 길게 뻗어있고, 그 왼쪽으로 시가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고속도로 오른편은 춘궁동·교산동·하사창동 일대가 멀리 남한산 아래까지 이어지는데, 온통 창고와 비닐하우스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개발제한으로 인해 정식 건물이 들어서지 못하고 창고시설이 몰려있는 듯했다. 조광 선생이 혀를 찬다.

"아이구… 이렇게 넓은 곳에 온통 창고들이 가득차 있는 것은 처음 보네요. 거의 '창고도시'라 불러도 될 만큼 창고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는 것을 보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산자락 아래 좋은 터들이 많을텐데… 다 못쓰게 됐겠네요."

조광 선생은 전체적인 하남시의 풍수에 대해서도 한마디 더했다.

"진산인 검단산은 그리 풍수적으로 잘생긴 산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빙 둘러 보아도 잘생긴 산이 별로 안보여요. 전체적인 도시 모양은 한강을 뒤로 두고 있는 모양새인데, 풍수에서는 강이 앞쪽에 있는게 좋아요. 게다가 고속도로가 가운데를 가로질러 기를 흩어놓으니, 전체적으로 도시가 안정되지 않고 큰 인물도 나오기 어렵다고 봐야겠어요."

이성산성을 둘러본 취재팀은 미사리선사유적지, 이성산성에 이어 또하나의 국가사적인 춘궁동 동사지(桐寺址·사적 제352호)를 찾았다. 고려 초기에 창건된 커다란 절이 있던 터로, 당시 금당의 규모가 경주 황룡사 금당에 못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같은 이름의 조그만 절이 옛 절터에 자리해 있는데, 넓은 절터 한쪽에 당당히 서 있는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2호)과 삼층석탑(보물 제13호)이 당시의 위세를 전해주는 듯했다.

"원래 사찰은 규모가 굉장히 컸겠네요. 비록 절터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뒤쪽으로 주산이 우뚝 서 지켜주고 있는 데다가 좌우로 청룡과 백호가 잘 감싸고 있어요. 주춧돌을 보니 중심 건물이 딱 좋은 자리에 서 있었고, 가운데 커다란 제단이나 부처님을 모셨던 것으로 보이는 8각형 구조물이 있는데 풍수를 잘 따져 자리를 잡은 것 같아요. 문제는 지금 바로 앞에 고속도로가 지나고 송전탑까지 서 있다는 것인데, 이런 것들 때문에 기운이 흩어질 수밖에 없어 너무 아쉽네요."

동사지 오층석탑과 삼층석탑이 서 있는 앞쪽에는 이곳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지임을 알리는 경고문이 붙어있다. 4만5천여㎡에 달하는 문화재보호구역과 주변에는 허가없이 건축물이나 각종 시설물을 설치·증개축할 수 없으며 위반시 중벌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경고문에서 채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속도로가 지나고 송전탑이 서 있고, 고철 처리장까지 있는 모습을 보니 이런 경고문구가 무색하기만 하다.

무거운 마음으로 동사지를 나와 인근의 교산동 건물지(향토유적 제5호)로 향했다. 이곳은 커다란 건물 주춧돌들로 인해 오랫동안 하남위례성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주목받아오다가, 1999~2002년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관청으로 사용됐음이 확인된 중요한 유적지다.

하지만 유적지 인근에 도착한 취재팀은 건물지를 찾느라 한참을 헤매야 했다. 유적지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어디에도 없다. 겨우 주민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건물지는 안내판이 낡아 너덜거리고 주변이 지저분했다. 그나마 유적지 내부는 정리가 되어 있어 다행이다.

"뒤로 문필봉을 이룬 주산이 우뚝 서 있고, 그 오른쪽으로 백호가 힘차게 뻗어있어요. 왼쪽으로 청룡도 잘 감고 있고, 앞쪽으로 작은 부봉이 안산을 이루며 서 있네요. 왼쪽으로 멀리 모양이 좋은 영상사도 두개나 있고요. 한눈에도 참 좋은 터라는 걸 알 수 있으니, 오랫동안 커다란 관청이 있기에 부족하지 않네요."

교산동 건물지에서 위안을 받은 취재팀은 바로 인근 하사창동의 천왕사지로 향했다. 천왕사지는 규모가 1만평이 넘는 대규모 사찰이 있던 곳으로, 발굴조사에서 높이만 288㎝에 달하는 '광주철불'(보물 제332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도착한 곳에는 비닐하우스와 창고건물들이 빼곡해 도무지 절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최근의 언론 기사나 답사기에 '대형 사리공 석재가 밭 구석에 무방비로 방치돼 있고 주변이 이미 개발돼 절터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현실은 더 심각했다. 사방으로 빼곡하게 들어선 대형 창고 건물들로 인해 주변 지형을 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성산성에서 보았던 창고들이네요. 풍수적으로 볼때 저쪽 산자락 아래에 사찰의 중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창고천지가 됐으니 아무 의미가 없지요. 물론 개발제한 같은 이유가 있겠지만, 좋은 땅들을 옛모습조차 알아볼 수 없게 이렇게 망가뜨리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한때 한성백제의 중심지였고, 초대형 사찰지와 건물지들도 전해지기에 하남시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취재팀은 몇몇 곳들을 더 돌아보며 아쉬움만을 거듭 확인해야 했다.

"풍수적으로 중요하기도 하지만, 도시의 자연과 역사와 문화는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건강과 정신과 마음을 의미합니다. 하남시가 자체적인 문화도 역사도 잃어가면서 서울에 딸린 '잠만 자는 도시'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서둘러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광 선생은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교훈을 전해주며 이날 취재를 마무리했다.

글/박상일기자
사진/김종택기자